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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JAMES PAGE</title>
		<link>https://jamespage.org</link>
		<description>My WordPress Blog</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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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Since this Sunday is Mother's Day, we are meeting with our son and daughter in law.]]></title>
			<link><![CDATA[https://jamespage.org/?kboard_content_redirect=413]]></link>
			<description><![CDATA[<p style="text-align:left;">어제 직장에서 일하는 아내가 운전하는 차의 check engine light이 켜졌다고 말했다. 난 불이 켜져 있느냐 아니면 깜빡이냐? 물었다. 아내는 켜져 있었다고 해서 일끝나고 Auto machanic Mr.황에게 가서 보여주라고 말했다. 만약 불이 깜빡이면 내가 알기에 운전하면 않되기 때문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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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황은 Acura TL의 Catalysis Converter안의
스크린에 carbon이 쌓여 불이 켜졌다고 말해서 지난 몇시간 동안 Catalytic convert에 대해서 알아 보았다. Catalytic Converter는 엔진에서 나오는 촉매 변환기로 배기 시스템에 위치한 필수적인 배출가스 제어 장치로, 백금, 팔라듐, 로듐과 같은 귀금속을 사용하여 유독성 배기가스(일산화탄소, 탄화수소)를 덜 해로운 수증기와 이산화탄소로 변환하는데 고장의 주요 징후로는 썩은 달걀 냄새, 가속력 저하가 되며 금속 가격이 높아 도난이 빈번하게 발생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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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되는 것은 highway를 자주 다니지않고 도시안에서 자주 stop하면서 low speed로 운전하기에 더 잘 carbon이 build up된다.
Catalytic Converter를 Replace하려면 돈이 많이 들 것으로 생각했는데 Mr.황은 솔직하게 cleaner가 있어서 그것을 쓰면 고쳐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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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Catalytic Converter Cleaner를 order했고 오늘 delivery가 되면 instruction에 따라 1/4 full gasoline tank에 16oz를 집어넣고 한 20분간 highway를 달릴 생각이다. 180K 운전한 Acura TL뿐아니라 내가 운전하는 Toyota Highlander도 가끔 CC를 개스통에 넣고 청소해 주어야겠다.
사람과 다르지않게 차도 mileage가 높으니 고쳐야 할 곳이 많다. 아들이 운전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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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돌아오는 주일은 Mother’s Day이기에 아들이 만나자고 할 것 같은데 괜찮은 식당은 거의 만원이 되기에 reserve를 할 수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집에 오라고 해서 음식을 만들어 집에서 대화하면서 식사하게 될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난 그것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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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성장함에 따라 엄마에 대한 자녀의 인식은 발달 단계, 경험, 그리고 정서적 필요에 영향을 받아 크게 변화한다. 다음은 연령대별로 자녀가 엄마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 전문가가 말한 것이다. (미국인 가정)

<strong>유아기 (생후 0~12개월)</strong>

*애착 대상: 이 시기에 엄마는 주로 위안과 안정감을 주는 존재로 인식된다.
*기본 욕구 충족자: 엄마는 수유, 기저귀 교체, 달래기 등 유아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있어 필수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strong>걸음마기 (생후 1~3년)</strong>

*탐색 지원자: 걸음마기 유아가 주변 환경을 탐색하기 시작하면서, 엄마를 안전한 거점으로 인식하게 된다.
*정서 조절자: 유아는 자신의 감정을 더욱 분명하게 표현하기 시작하며, 다양한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에 대한 단서를 얻기 위해 엄마를 바라보게 된다.

<strong>취학 전 연령 (3~5세)</strong>

*영웅적 존재: 엄마는 종종 문제를 해결하고 위로를 건네는 영웅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역할 모델: 엄마의 행동을 모방하기 시작한다.

<strong>초등 저학년 (6~8세)</strong>

*지식의 원천: 아이들은 엄마의 조언과 인정을 더욱 비판적이고 신중한 태도로 구하게 된다.
*복합적인 감정 이해: 엄마를 단순히 자신을 돌봐주는 양육자가 아닌, 고유한 감정과 욕구를 지닌 한 명의 인격체로 인식하게 된다.

<strong>중기 아동기 (9-12세)</strong>

*지지 체계: 아이들은 엄마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스스로의 자율성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또래와의 비교: 아이들은 엄마를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며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된다.

<strong>청소년기 (13-18세)</strong>

*긴장된 관계: 엄마를 도전해야 할 권위적인 존재로 인식할 수도 있다.
*정서적 복잡성: 청소년들은 정서적 지지를 구하며 엄마를 믿을 수 있는 조력자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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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20대</strong>

• 독립심의 성장: 청소년기에 받았던 지도에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
• 친구 관계 형성: 엄마를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기 시작하며, 솔직한 소통과 상호 존중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 가치관의 재평가: 이 시기에는 가족의 가치관과 신념을 재평가하게 되면서 삶의 선택과 포부에 대해 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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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30대</strong>

• 희생의 이해: 30대가 되면 직장 생활과 인간관계를 헤쳐나가면서 엄마의 희생에 대해 더욱 깊이 감사하게 된다.
• 부모 역할: 만약 그들이 부모가 된다면, 엄마를 육아에 대한 지혜의 원천으로 여기게 되고 엄마의 조언을 구하는 동시에 자신만의 육아 방식을 정립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 복잡한 관계: 많은 사람들이 엄마와 굳건한 유대감을 유지하지만, 개인의 책임과 가족의 기대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다.

<strong>40대</strong>

• 상호 존중과 지지: 40대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와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성숙한 관계를 형성한다.
• 유산에 대한 성찰: 가족의 전통과 가치를 되돌아보고, 그것들을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전승할지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 감정적 복잡성 증가: 삶의 어려움을 마주하면서 감사와 책임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적 양상을 띠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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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미국인들이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그들이 보는 아빠의 모습이 많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strong>

5살 — 아빠는 나의 영웅.
7살 — 아빠는 모든 걸 다 알아.
10살 — 아빠는 내게 너무 많은 걸 바라셔.
12살 — 아빠는 도무지 날 이해 못 하셔.
14살 — 아빠는 항상 너무 엄격하셔.
16살 — 왜 아빠는 늘 나만 못 잡아먹어 안달이실까?
18살 — 난 내 인생을 살아야 해.
22살 — 아빠는 내 선택을 이해 못 하셔.
25살 — 어쩌면 아빠는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려 하셨던 건지도 몰라.
30살 — 아이를 훈육하는 내 모습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와.
35살 — 아빠의 희생이 비로소 이해돼.
40살 — 아빠는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무거운 짐을 홀로 감당하고 계셨어.
45살 — 아빠의 그 엄격함은 사랑이 변장한 모습이었어.
50살 — 오늘 아빠가 곁에 계셨다면, 난 아빠 곁에 더 오래 머물며... 더 많은 것을 여쭤보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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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는 비가 온다. 다음 주일서부터 교회에서 Discovery Class에 들어가 교회멤버가 되는 과정을 밟는다. 다음주중에 아내가 은퇴하게 되니 더 많은 시간 교회에 참여하고 친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어진다.]]></description>
			<author><![CDATA[James Park]]></author>
			<pubDate>Wed, 06 May 2026 12:35:5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jamespage.org/?kboard_redirect=1"><![CDATA[오늘의 단상]]></category>
		</item>
				<item>
			<title><![CDATA[If Jesus is the most important figure in human history, Roman records should support it]]></title>
			<link><![CDATA[https://jamespage.org/?kboard_content_redirect=412]]></link>
			<description><![CDATA[얼마전 한 사람을 만났다. 난 그에게 성경에 대해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는 예수에 대한 기록이 성경밖에 없으면 어떻게 그가 진실로 세상에 태어나고 나중에 십자가에 못박혔고 부활했는지 어떻게 알겠냐고 물었다.
해서 며칠전 Youtube에서 찾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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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 외에는 예수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식 기록이나 정부 문서, 로마 기록 보관소에도 기록이 없다는 것이죠. 이러한 가정을 근거로 회의론자들은 세속적인 확증이 없으니 예수의 생애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로마인들도 예수에 대해 기록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기독교를 “파괴적인 미신”이라고 경멸했던 사람이 예수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기록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는 척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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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Immanuel Kant)

회의론의 기원을 이해하려면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살펴봐야 합니다. 당시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기독교에 대한 합리적인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들의 핵심 주장은 만약 예수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면 로마 기록이 그것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합리적인 질문처럼 보였고, 시간이 흐르면서 일반적인 반론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대학 강의실, 대중 역사책, 그리고 인터넷 댓글란을 통해 퍼져나간 이 주장은 특별한 주장은 특별한 증거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쓴 성경이 있으니 다른 증거를 제시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는 부당한 반론이 아닙니다. 가톨릭 지식 전통은 아우구스티누스부터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신앙과 이성이 적이 아니라고 일관되게 가르쳐 왔습니다. 따라서 비기독교 세계, 즉 로마 세계가 나사렛 예수에 대해 실제로 무엇을 기록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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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중요한 로마 기록은 고대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가로 여겨지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의 저서 『연대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타키투스는 로마 원로원 의원이자 집정관이었으며, 서기 116년경에 쓰인 그의 저서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꼼꼼하게 자료를 조사한 문헌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타키투스는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연대기』 제15권 44장에서 기독교에 대한 경멸을 드러냅니다. 이 구절에서 그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우리 총독 중 한 명인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손에 극형을 당했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사건 발생 후 수십 년이 지난 시점에 정부 기록을 참고하여 글을 쓴 로마 원로원 의원이 역사적으로 검증 가능한 세 가지 사실을 확인한 것입니다.
첫째, 크리스투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실존했다는 것과 둘째, 그가 처형당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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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처형은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 폰티우스 필라투스에 의해 집행되었는데, 이는 복음서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일부 회의론자들은 이 구절이 후대 기독교 필사자에 의해 변조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이는 타당한 검토 대상입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타키투스가 기독교를 “가장 해로운 미신”이라고 부르며 유대뿐 아니라 로마에까지 퍼진 치명적인 것이라고 묘사한 점을 지적합니다. 어떤 기독교 필사자도 자신들의 신앙을 치명적인 미신이라고 부르는 구절을 위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는 역사가들이 말하는 적대적 증인의 예시이며, 적대적 증인이면서도 주장을 뒷받침하는 경우 가장 강력한 역사적 증거 유형입니다. 즉, 기독교를 반박해야 할 로마 지식인들이 기독교를 조롱하는 행위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역사적 사실을 확인시켜 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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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증인은 역사적으로 소 플리니우스로 알려진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플리니우스입니다. 서기 112년경, 그는 현재 터키 북부에 위치한 비티니아 폰투스 지방의 로마 총독이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플리니우스는 황제 트라얀에게 편지를 보내 심문했던 기독교인들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그들은 정해진 날 새벽에 모여 그리스도를 신처럼 숭배하고 찬송가를 부르며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적었습니다.

플리니우스는 황제에게 이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조언을 구했습니다. 사형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는 신학 문서가 아닌, 지방 총독이 로마 황제에게 법률 및 행정 문제를 보고하는 정부 문서라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플리니우스는 십자가형 이후 80년 이내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려는 조직적인 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이 신화라고 알고 있는 것을 위해 죽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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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증인은 유대인 역사가 티투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입니다. 서기 37년경부터 100년경까지 살았던 그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유대-로마 전쟁에 참전했고, 이후 로마의 후원을 받아 역사가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요세푸스는 그의 저서 『유대 고대사』에서 예수에 대해 두 번 언급합니다. 그중 첫 번째 언급은 ‘플라비우스 증언’으로 알려져 있으며, 수 세기 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이 구절은 비기독교 유대인들이 전혀 언급하지 않는 방식으로 예수를 찬양하고 있어, 그 진위 여부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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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들은 종종 예수에 대한 언급을 각색한 후대의 기독교 필사자들을 지적합니다. 존 마이어와 같은 존경받는 학자들은 원문이 예수에 대한 중립적이거나 약간 부정적인 언급이었을 것으로 재구성하며, 후대에 수정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나오는 예수에 대한 두 번째 언급은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유대 고대사』 20권에서 요세푸스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 그리스도라 불린 자”라고 언급하는데, 이는 대수롭지 않은 언급이었기에 수정 없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로마 독자를 대상으로 글을 쓴 요세푸스는 예수를 이미 알려진 인물로 언급했습니다. 따라서 “로마인들이 예수를 기록했는가?”라는 질문보다는 “왜 우리는 로마인들이 예수를 기록했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했을까?”라는 질문이 더 중요합니다. 로마 시대의 작가 세 명, 그중 두 명은 기독교에 적대적이었고 한 명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증거는 동일 인물, 동일 처형, 그리고 그의 사후 수십 년 만에 제국 전역으로 확산된 동일한 폭발적인 운동을 가리킵니다. 세속 역사 기록 또한 이를 뒷받침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문서들이 가톨릭 수도사들에 의해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중세 수도원의 필사실에서 여러 세대에 걸친 수도사들은 고대 문헌을 정성스럽게 필사하며 불편한 문서조차 걸러내지 않고 보존했습니다. 진실은 검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의 이러한 학문적 투자는 현대 역사가들에게 회의론자들이 교회를 의심하는 데 사용하는 바로 그 문서들을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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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회 역사가인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는 4세기에 세속 자료를 변증의 증거로 인용했고,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도시』에서 이교 철학과 역사를 직접 다루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성과 계시의 조화를 바탕으로 자신의 지적 프로젝트를 구축했습니다. 교회는 세속적 증거를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 보존에 기여했습니다.
물론 정직하고 사려 깊은 회의론자들은 요세푸스와 타키투스의 일부 구절에 대해 타당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요세푸스의 구절은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타키투스의 구절 또한 일부 학자들에 의해 의문이 제기됩니다. 이러한 텍스트 논쟁은 정당한 영역이며, 진지한 가톨릭 변증가라면 이를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한 발짝 물러나 전체적인 그림을 보면, 로마 세계에서 나온 세 가지 독립적인 자료, 그중 두 가지는 적대적인 증인이고, 하나는 로마 황제에게 보낸 정부 문서이며, 모두 십자가형 후 80년 이내에 나온 것이고, 모두 같은 사람, 같은 죽음, 로마 제국이 말살하려 할 때조차 성장을 멈추지 않았던 같은 운동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문제는 역사가 나사렛 예수를 기록했는지 여부가 아닙니다. 역사는 그를 기록했습니다. 진정한 질문은 바로 그 기록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것입니다. 역사는 그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폰티우스 필라투스 치하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역사만으로는 교회가 2,000년 동안 선포해 온 진리, 즉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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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는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12사도도 아니었고,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에서 교육받은 의사였던 그는 신약성경에서 다른 어떤 저자보다 많은 부분을 기록했습니다. 바울보다도, 베드로보다도, 요한보다도 더 많이 썼습니다. 그의 복음서인 사도행전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긴 책이고, 그 후속편인 누가복음은 두 번째로 긴 책입니다. 이 두 책을 합치면 신약성경 전체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누가의 이야기가 그토록 놀라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안전한 곳에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과 함께 난파선을 헤쳐 나갔고,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받던 도시들을 직접 걸어 다녔으며, 감옥을 방문하고 목격자들을 인터뷰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훈련된 과학자처럼 정확하게 모든 것을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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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 성벽)

고고학자들은 그가 쓴 내용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계속해서 발굴해내고 있습니다. 한때 그를 신뢰할 수 없다고 일축했던 역사가들은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안티오크 출신의 이교도 의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꼼꼼한 전기 작가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는 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을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고대 세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국과 역병, 그리고 모든 것을 바꿀 급진적인 새로운 신앙이 존재하던 시대 말입니다.

누가는 로마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 중 하나였던 안티오크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안티오크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리석 신전, 공중목욕탕, 야외 시장이 즐비한 거대한 대도시에 밀집해 살았습니다. 이곳은 변방의 작은 마을이 아니었습니다. 안티오크는 그리스 문화, 로마의 권력, 그리고 동방의 신비주의가 충돌하는 곳이었습니다. 철학자들은 회랑에서 논쟁을 벌였고, 상인들은 중국에서 비단을, 인도에서 향신료를 거래했습니다. 그리고 거리에서는 아침 식사 전부터 12개 이상의 언어가 오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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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는 그리스인이었기에 고대 세계에서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의학을 선택했습니다. 1세기의 의사는 오늘날의 의사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항생제도, 마취제도, 세균에 대한 이해도 없었습니다. 로마 시대 의사들은 약초를 이용한 치료법과 고문 도구처럼 생긴 수술 도구, 그리고 많은 추측에 의존했습니다. 하지만 로마 최고의 의사들, 즉 그리스 전통에서 훈련받은 의사들은 돌팔이들에게는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체계였습니다.

그들은 증상을 관찰하고, 기록을 남기고, 사례들을 비교했습니다. 누가가 훈련받은 히포크라테스 전통은 단순히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만 가르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하는 방법, 실제로 아는 것과 추측하는 것을 구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이러한 훈련은 결국 예수에 대한 가장 상세한 전기를 탄생시켰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아직 예수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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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가 안티오크에서 성장하는 동안, 남쪽으로 480km 떨어진 예루살렘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유대인 목수가 추종자들을 모았고, 로마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추종자들에 따르면 그는 죽음에서 부활했습니다. 하지만 그 주장은 예루살렘에서 이미 사라졌어야 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이미 수천 명의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까요. 메시아 운동은 계절처럼 왔다가 사라지곤 했습니다.

몇 년에 한 번씩 카리스마 넘치는 설교자가 추종자들을 모으고 당국에 의해 처형당하면, 그 운동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곤 했습니다. 역사가들은 예수 시대를 전후한 100년 동안 적어도 12명의 실패한 메시아 인물을 꼽습니다. 그들은 모두 잊혀졌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흩어지는 대신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제국의 모든 곳으로 그들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 간 곳 중 하나가 안티오크였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부분입니다. 안티오크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곳입니다. 예루살렘도 아니고, 로마도 아닙니다. 바로 누가의 고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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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는 젊고 교육받은, 이성적이고 관찰하고 진단하는 훈련을 받은 그리스 의사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의 도시는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 이민자들로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에서 의학을 공부한 그에게는 이 말이 미친 소리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철학, 논리, 이성을 믿었습니다. 물론 그들만의 신들이 있었지만, 육체적인 부활이라는 개념은 그들의 세계관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가능성이 낮을 뿐만 아니라,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

플라톤과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은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누가 그런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겠습니까? 하지만 누가는 이 이야기를 일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조사했습니다. 당시 그 조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안티오크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바탕으로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곳의 기독교 공동체는 고대 세계에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식사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문화적 금기였습니다. 부유한 후원자들은 노예들과 식사를 나누고, 사람들은 재산을 모아 가난한 사람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유대인 교사가 죽음에서 부활했고, 사실상 창조주였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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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k위에 있는 큰 화분에 여러 씨를 뿌렸는데 싹들이 많이 났다. 참외씨인가? 오이씨인가? 아직 잘 모르겠다. 조금 더 커야 알 수 있겠다.]]></description>
			<author><![CDATA[James Park]]></author>
			<pubDate>Mon, 04 May 2026 20:44:0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jamespage.org/?kboard_redirect=2"><![CDATA[한주간 배우며 생각한다]]></category>
		</item>
				<item>
			<title><![CDATA[Yesterday, I found myself thinking of my eldest sister, who passed away two and a half years ago.]]></title>
			<link><![CDATA[https://jamespage.org/?kboard_content_redirect=411]]></link>
			<description><![CDATA[어제는 2년반전에 세상을 떠난 큰누나 생각이 났다. 625를 겪으면서 부모를 도와 어린 동생들을 위해 고생을 했고 RN으로 캐나다로 이민갔다가 미국으로 들어와 살면서 우리 가족을 미국에 초청해 이민오게 해준 누나 말이다. 그녀는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힘든 세월도 보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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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부모님 산소에 들려 꽃을 꽂고 큰누나에게 말했고 그녀의 대답 메세지가 아직 남아 있다.)

큰매형이 누나의 시신을 화장한후 아직 Ash를 가지고 있는지 버렸는지 알 수없고 그가 늦은 나이에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고 살기에 막내동생의 무덤에 찾아가듯 만날 수도 없다. 자녀들이 남들 처럼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 그녀에게는 가슴 아펐을 것이다.
언젠가 어느 교회 한인목사가 교인들이 화장하는 것이 옳은지 틀린지 신학적으로 길게 따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Cornerstone Chapel의 Gary목사는 간단히 얘기했다. “화장하는 것은 육체가 썩어 없어지는 시간을 짧게 단축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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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e메일에 한국에서 중고등학교을 6년간 같이 다녔던 한 친구 Y가 세상을 떠났다는 메세지를 받았다. 그는 몇년전 미국을 3명의 친구들과 방문해서 내가 워싱턴 디씨를 안내해 준 친구들중에 한명이었다. 그는 내가 친구들을 집에 초청해 식사대접을 했더니 $200을 주었다. 난 동창회에 보낸다고 말했고 나중에 보냈다.
난 학교 다닐때 그와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갔을때 난 그에게 전화해서 학교에 다닐때 사귀었던 한 친구에 대해서 알려고 했는데 그는 내게 자기가 필요하면 전화할테니 자기에게 전화하지 말라고 해서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가 돈이 좀 있는 친구같아서 동창들이 아쉬운 소리를 많이했겠구나 생각하고 이해를 했고 다시 그에게 전화할 일은 없었다. (워싱턴 고대동문회원들의 주소록에도 큰 사업을 하는 동문의 이름은 빠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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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5년 전 대장암 수술 후 완치 단계에 이르렀으나, 재발과 위장으로 전이되어 결국 떠났는데 그가 가졌던 대장암은 한국인 암 사망 원인 3위로 인구 10만명당 약 17~18명 수준의 사망률을 보이며, 한국의 대장암 발병률은 세계 1위 수준으로 매우 높으나 5년 생존율은 75%를 넘는다고 한다.
대장암의 주요 원인은 붉은 육류 및 가공식품 과다 섭취, 섬유질 부족, 비만, 음주, 흡연, 신체 활동 부족등 잘못된 식습관과 생활 환경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50세 이상 대장 용종 과거력, 만성 염증성 장질환 및 가족력(유전)도 주요 위험 요인이라고 한다.
술을 마시고 삼겹살을 먹는 것은 암에 비료를 주는 것과 같다고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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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2년전에 colonoscopy를 해서 17개의 종양을 발견하고 다 치료한 경험이 있다. 의사는 다시 검사를 하라고 하는데 사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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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친구가 보내준 위의 신일 고등학교 4회 졸업생들 사진의 55명중 절반이상이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신일중고등학교 동기동창인 Y는 살아있을때 늘 주변과 지역사회에 베풀며 살았고 IMF와 코로나-19 때는 자기 건물 세입자들에게 월세를 안 받았다고 한다. 그는 물론 가족에게도 남편 아빠 할아버지로 좋은 이미지를 주었으리라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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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다가 가면 장례식에서 그가 살았을때 얼마나 화려한 삶을 살았는지 말을 하지않는다. 그가 백만장자로 살았든 억만장자로 살았든 상관이 없이 말이다. 다만 얼마나 가족들을 사랑했고 주위 사람들에게 얼마나 좋은 사람으로 도움을 주었는지 말을 한다. 탈무드에 나오는 세친구처럼 그와 무덤에 같이 가는 친구는 선행인 것이다.

https://youtu.be/zmEU7WVXo8c?si=9dS0xdnMdU4D7YNT
영화 Gladiator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난다. Emperor와 그에게 가족을 다 잃고 온갖 고생을 했던 Maximus가 싸우고 둘이 죽었는데 악하고 화려하게 살았던 emperor를 거들떠 보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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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살면서 사람들이 기억할 것을 남긴 것도 없고 내 무덤이 남겨진다고 해도 아들밖에는 찾아 올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해서 아내에게 내가 먼저 가게 되면 화장을 하고 주소는 남겨두라고 말했다. Prince William County에 있는 Cemetery에 조그만 곳에 이름이라도 남겨두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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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혼이 세상에 어느 기간 배회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예수가 한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Abraham’s Bosom)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기에 그 강도의 죽은 육체를 떠난 혼은 더이상 지상에 있지않았다. 죽은 후 혼이 이승에 머무르며 떠다닌다는 것은 민속 신앙이나 귀신 이야기의 영역에서 주로 얘기되는 것 같다.😄]]></description>
			<author><![CDATA[James Park]]></author>
			<pubDate>Fri, 01 May 2026 15:59:3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jamespage.org/?kboard_redirect=1"><![CDATA[오늘의 단상]]></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이슬람의 수니파와 시아피가 다른 12가지]]></title>
			<link><![CDATA[https://jamespage.org/?kboard_content_redirect=410]]></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jamespage.org/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7/202604/69f24b29b1f777008359.jpeg" alt="" />

1979년 이전까지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서방에 우호적인 군주국으로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했습니다. 그러나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으로 샤가 축출되고 시아파 신정 체제가 수립되면서 사우디아라비아는 걸프만 건너편에 수니파 군주제의 정통성에 도전하고 이슬람 혁명을 촉구하는 시아파 혁명 국가가 등장하자 공포에 떨었습니다. 특히 이란 동부 시아파 소수민족 거주 지역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어, 현재 상황은 시아파 이란과 수니파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새로운 냉전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중동 전역에서 대리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2003년 미국이 수니파 사담 후세인을 축출하고 시아파 다수 세력이 집권하면서 이란은 시아파 정당과 민병대를 통해 이라크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이란과 동맹을 맺은 시아파 정부가 사우디 국경 바로 옆에 들어섰다는 점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더욱 불안하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2003년부터 2011년까지 10만 명이 넘는 이라크 민간인이 사망했는데, 그중 상당수는 시아파 민병대의 종파 갈등으로 희생된 수니파였습니다. 시리아에서는 이란이 알라위파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고, 사우디아라비아와 걸프 국가들은 수니파 반군을 지원하면서 50만 명 이상의 사망자와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사망자 중 최소 20만 명은 아사드 정권의 탄압에 희생된 수니파 민간인이었습니다. 예멘에서는 이란이 자이디파 시아파 후티 반군을 지원하고, 사우디아라비아는 2015년부터 후티 반군을 폭격하는 연합군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예멘의 상황이고 유엔이 세계 최악의 인도주의 위기라고 부르는 상황을 초래되었으며 전투 또는 기아와 질병으로 37만 7천 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의 대다수는 전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수니파와 시아파 민간인이었습니다. 레바논에는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민병대인 헤즈볼라가 있는데, 이들은 레바논 군대보다 더 강력합니다.

그리고 2006년 이스라엘과의 전쟁 당시 1,000명이 넘는 레바논 민간인이 사망했는데, 그중 상당수는 헤즈볼라 활동 지역에 살던 수니파였습니다. 바레인은 인구의 70%가 시아파이지만 수니파 군주가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2011년 시아파 시위가 발생하자 사우디아라비아는 군대를 파견해 진압했습니다. 이처럼 1,400년 묵은 종교적 분열은 종파적 수사를 이용해 대리 전쟁을 정당화하는 지정학적 권력 투쟁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일입니다.

수십만 명의 평범한 수니파와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러한 분쟁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테헤란과 리야드의 정치 엘리트들은 계속해서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습니다.

수니파와 시아파 이슬람의 12가지 주요 차이점을 살펴 보겠습니다.
시아파의 입장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아파 무슬림들은 '우술 알딘'이라고 부르는 종교의 근본 원칙 다섯 가지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알라의 유일성을 의미하는 타우히드, 신의 정의를 의미하는 아들, 예언자직을 의미하는 누부와, 신이 임명한 12명의 지도자를 믿는 이맘직, 그리고 심판의 날을 의미하는 마아드입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점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섯가지 중 하나는 '아들(Adl)', 즉 신성한 정의라고 불리는데, 이는 단순히 멋진 철학적 개념이 아닙니다. 그들이 의미하는 바는 알라께서 절대적으로 정의롭게 행동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의는 그분의 본성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아파 무슬림은 알라께서 불의한 일을 하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선과 악은 계시뿐 아니라 인간의 이성으로도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수니파 입장은 완전히 다릅니다. 수니파 무슬림은 알라와 그의 천사들, 그의 경전들, 그의 사도들, 심판의 날, 그리고 신의 섭리에 대한 믿음, 즉 6가지 신앙 조항을 따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이슬람의 5대 기둥, 즉 실천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핵심적인 차이점은 수니파는 신의 정의를 별도의 의무적인 기둥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알라의 본성에 의무를 부과할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알라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그분이 알라시기 때문에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며, 우리는 인간의 기준으로 그분의 행동을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맘직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시아파 무슬림은 알라께서 예언자의 가문에서 12명의 무오한 지도자, 즉 이맘을 임명하셨으며, 이 이맘들은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죄와 오류로부터 완전히 보호받는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수니파 무슬림은 이를 완전히 부정합니다. 이는 시아파 무슬림들이 오직 예언자만이 무오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아파 무슬림들과 시간을 보내다 보면 수니파 무슬림들이 매우 불편해하는 것을 듣거나 보게 될 것입니다. 시아파 무슬림들은 "야 알리"라고 말하는데, 이는 "오 알리"라는 뜻입니다. 또한 "야 파티마", "야 후세인", "야 하산", "야 압바스"와 같이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족 중 돌아가신 분들을 부르는 것입니다. 깃발이나 현수막에 손 모양, 특히 압바스의 손 모양이 그려진 것을 볼 수 있고
집과 차에 초록색과 검은색 깃발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을 숭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라께 중재를 부탁하는 것뿐입니다. 이들은 알라와 가까운 성스러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 알리'라고 말할 때는 마치 살아있는 의로운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하듯 알리에게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니파 무슬림들은 이를 완전히 다르게 봅니다. 그들은 이것을 타와술, 즉 죽은 자를 통해 중재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는 쉽게 알라와 동등한 존재를 숭배하는 우상숭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죽은 자에게 기도하는 것은 비록 중재를 구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위험하며 이슬람의 테두리 밖으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야 알라"라고 직접적으로 알라께 기도해야 한다고 합니다. 수니파 이슬람 내에는 중재를 구하는 한 형태로 "야 무함마드"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수피파 무슬림도 있지만, 다른 많은 수니파 학자들은 이를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이것과 더불어 알라 외의 다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우상숭배(쉬르크)로 간주하십시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추상적인 신학적 논의가 아니라, 그들의 일상 언어에서, 그리고 가정생활에서 실제로 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한 가지 믿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예언자 무함마드(평화가 그에게 있기를)를 포함한 모든 예언자들이 정의를 세우기 위해 왔지만 성공하지 못했으며, 오직 이맘 마흐디만이 예언자들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수니파는 이 내용을 읽고 순수한 신성모독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언자가 자신의 사명을 완벽하게 완수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차이점은 계승 논쟁입니다. 자, 이제 1400년 전인 서기 632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바로 이 시점부터 분열이 시작됩니다. 예언자 무함마드께서 세상을 떠나셨고, 무슬림 공동체 전체는 지도자를 잃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누가 예언자의 뒤를 이을 것인가라는 중대한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시아파 무슬림들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실제로 후계자를 지명했으며, 이는 메카와 메디나 사이에 있는 연못인 가디르 쿰이라는 곳에서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이 일은 예언자가 마지막 순례를 떠나기 불과 몇 달 전에 발생했습니다. 시아파 자료에 따르면, 예언자 무함마드는 10만 명이 넘는 대규모 행렬을 사막 한가운데에 멈춰 세우고 후계자를 지명했습니다.

알리가 손을 하늘로 들고 "من كنت مولاه فهذا علي المولى"라고 말했는데, 이는 "내가 누구든, 그의 마울라 알리는 그의 마울라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마울라'는 친구 또는 주인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시아파 무슬림들은 '마울라'가 명백히 주인이나 지도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언자 무함마드께서 왜 굳이 10만 명의 사람들을 멈춰 세우고 "알리는 내 친구다"라고 말씀하셨겠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우마르가 알리에게 "이제..."라고 축하 인사를 건넨 것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너는 이제 모든 믿는 남녀의 스승이 되었다." 그러나 예언자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알리가 예언자의 시신을 씻는 동안 사키파에서는 정치 회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시아파 자료에 따르면, 알리가 그 자리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마르와 아부 바크르는 이 회의에 급히 참석했고, 정치적 책략을 통해 아부 바크르가 초대 칼리프가 되었다고 합니다. 시아파는 이를 명백한 정치적 쿠데타라고 주장합니다. 이제 수니파의 견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시아파의 주장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의견이 다릅니다. 수니파 무슬림들은 가디르 쿰 전투가 실제로 일어난 것은 맞지만, '마울라'라는 단어는 정치적 후계자가 아니라 단순히 친구를 의미하며, 예언자 무함마드가 알리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사키파 전투를 지지하는 수니파들은 이 전투가 협의를 통한 합법적인 선거였으며, 아부 바크르가 가장 자격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알리 자신이 결국 아부 바크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점을 들어 알리가 그의 지도력을 인정했음을 증명한다고 주장합니다.

세 번째 차이점은 이맘 마흐디에 대한 견해입니다. 이제 가장 놀라운 차이점 중 하나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수니파와 시아파 모두 종말에 나타날 마흐디라는 인물을 믿지만,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실제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수니파의 입장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수니파 무슬림은 마흐디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인물이며, 종말의 때가 다가오면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인 파티마를 통해 태어날 것이며, 그의 이름은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마흐디는 7년에서 9년 동안 통치하며 정의를 확립할 것입니다.

하지만 시아파 무슬림의 믿음을 살펴보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시아파 무슬림은 마흐디가 바로 12번째이자 마지막 이맘인 무함마드 알 마흐디이며, 그는 이미 태어났다고 믿습니다.
서기 868년, 1100년도 더 전의 일입니다. 하지만 12대 이맘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11명의 이맘이 누구였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이는 매우 기본적인 사항입니다. 첫 번째 이맘은 예언자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립입니다. 두번째 이맘은 알리의 아들 하산입니다. 세 번째 이맘은 카르발라에서 순교한 후세인입니다. 그리고 후세인의 후손인 알리 자인, 알 아비딘, 무함마드 알 바키르, 자파르 알 등이 그 계보를 잇습니다. 사디크, 무사 알카힘, 알리 알리다, 무함마드 알자와드, 알리 알하디, 그리고 11대 이맘인 하산 알아스카리.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아파 무슬림들은 이 12명의 이맘이 신의 뜻에 따라 임명되었으며 무오류라고 믿고, 세상은 언제든 이맘 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는 점입니다. 11대 이맘인 하산 알아스카리가 아바스 왕조 통치자들에 의해 독살당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당시 그의 아들 무함마드 알마흐디는 겨우 5살이었습니다.

그리고 통치자들이 알라께서는 예언자의 가족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어린 마흐디를 시아파에서 은둔이라고 부르는 기간을 통해 숨기셨는데, 이는 그가 숨어 지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는 오늘날까지 살아 있습니다. 이 은둔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서기 874년부터 941년까지의 소은둔으로, 이 기간 동안 숨어 있던 이맘은 네 명의 대리인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서기 941년에 네 번째 대리인이 사망하면서 대신둔이 시작되었고, 그 이후로 계속되었습니다.

시아파 무슬림들은 이맘 마흐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믿습니다. 알라께서 그의 생명을 기적적으로 연장해 주셨다는 것이죠. 자, 여기서 현대 정치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는데, 이란에는 '윌라야트 알 파키흐'라는 정부 체제가 있는데, 이는 '법학자의 후견인 제도'를 의미합니다. 즉, 최고 지도자, 호메이니든 하메네이든, 그는 단지 숨겨진 이맘을 대신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임시 후견인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말입니다.

이란 정부는 스스로를 궁극적인 이슬람 권위자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진정한 지도자, 즉 제12대 이맘이 돌아올 때까지 상황을 관리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맘 마흐디가 나타나는 순간, 최고 지도자는 즉시 물러나 모든 권력을 그에게 넘겨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란 지도자들이 마흐디의 귀환을 위한 준비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말 그대로 그들의 정치 체제 전체의 신학적 기반입니다.

네 번째 차이점은 쿠란에 대한 견해입니다. 이제 가장 논란이 많은 차이점 중 하나인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쿠란이 완전하고 변함없는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는 신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격렬한 논쟁이 될 수 있습니다. 수니파의 입장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는 매우 명확합니다. 수니파 무슬림은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쿠란이 완전하고 변함없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꾸란은 예언자 무함마드(평화가 그에게 있기를)에게 계시된 날부터 100% 완전하고 변함없이 그대로입니다. 글자 하나도 추가되거나 삭제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알라께서 친히 "우리가 꾸란을 내려보냈고, 우리가 그것을 보호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꾸란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알-히즈르 장 9절에 나옵니다.
수니파는 꾸란이 수천 명의 사하바(예언자의 동료)들에 의해 암송되었다고 지적할 것입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생전에 만들어졌고, 이후 우스만 칼리프 시대에 하나의 책으로 엮였습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암기했기 때문에 단어 하나라도 바꾸려는 시도는 즉시 발각되어 거부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시아파의 입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서부터 상황이 복잡해지는데, 시아파 내부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아야톨라 시스타니와 아야톨라 하메네이를 포함한 대다수의 현대 주류 시아파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쿠란은 완전하고 변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슬람의 테두리 밖에 있는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논란이 발생합니다. 고대 시아파 학자들과 오늘날 일부 시아파 집단은 원래 쿠란에 알리와 아흘 알바이트에 관한 구절이 추가로 있었고, 예언자 사후 사하바(동료들)가 이 구절들을 삭제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언급하는 시아파 하디스 모음집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파티마 무샤프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가 소장했던 완전한 쿠란이라고 전해집니다. 일부 시아파 무슬림들은 이 완전한 원본 쿠란이 현재 이맘 마흐디가 은둔 중에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가 돌아오면 이 무샤프를 가져와 숨겨져 있던 구절들을 드러낼 것이며, 현재의 쿠란도 실천하기에는 충분히 정통적이지만 완전한 버전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수니파 무슬림들은 이러한 믿음을 절대적인 쿠프르(불신)로 간주합니다. 쿠란이 변질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알라께서 그분의 책을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아파 신학에서 가장 위험한 믿음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주장은 이슬람의 근간 전체를 뒤흔듭니다. 하지만 현대 주류 시아파 학자들은 쿠란이 완전하다는 파트와(종교적 칙령)를 발표하며 이 믿음을 반박했습니다. 따라서 이는 시아파 이슬람 내부에서도 쿠란의 진위성을 인정하는 그룹과 인정하지 않는 그룹으로 나뉘는 분열을 초래합니다.

다섯 번째 차이점: 하디스 출처. 여기서부터 정말 논란이 되는데, 수니파와 시아파는 어떤 지도자가 정통인지에 대한 의견 차이뿐만 아니라, 종교적 가르침을 도출하는 데 사용하는 경전 자체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차이가 발생합니다. 먼저 시아파의 접근 방식을 설명하겠습니다. 시아파 무슬림은 소위 네 권의 경전을 사용하는데, 이는 쿨레이니의 《알 카흐피》, 사두크의 《만 라야두루후 알 파키흐》, 그리고 《알 파키흐》입니다.

투시가 쓴 《타디브》와 《알-이스티브사르》라는 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시아파 무슬림은 어떤 책도 100% 진본이 아니며, 각각의 하디스는 개별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시아파 무슬림은 예언자의 가족인 알-알-바이트에 충성했던 전승자들의 하디스만 인정합니다. 그들은 아부 바크르, 우마르, 아이샤가 전한 하디스는 완전히 거부하는데, 이들이 알리의 정당한 지도력에 반대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5,000개가 넘는 하디스를 전한 아부 후라이라라는 사람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부 후라이라를 거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예언자께서 돌아가시기 전 단 4년 동안만 무슬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5,000개의 하디스를 전했습니다. 반면, 어린 시절부터 예언자와 함께 자란 알리는 수니파 경전에 고작 58개의 하디스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아파 무슬림들은 "이게 말이 되느냐?"고 묻습니다. 이제 수니파의 입장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수니파 무슬림들은 6권의 경전을 가지고 있으며, 그중 가장 중요한 두 권을 꼽을 수 있습니다.

사히 부하리와 사히 무슬림은 어떤 하디스 모음집인가요?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니파 무슬림은 사히 부하리와 사히 무슬림을 100% 진본이며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들은 정치적 입장에 관계없이 신뢰할 수 있는 사하바(예언자의 동료)의 하디스를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아부 후라이라는 신뢰할 수 있는 전승자로 여겨지며, 그가 많은 하디스를 전한 이유는 이슬람을 받아들인 후 평생을 배우고 가르치는 데 헌신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차이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 설명드리겠습니다. 두 파벌은 서로 다른 전승자를 인정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서로 다른 하디스를 갖게 되고, 이는 곧 서로 다른 법적 판결과 예언자의 실제 말씀과 행적에 대한 다른 해석으로 이어집니다.

여섯 번째 차이점은 사하바에 대한 견해입니다. 이제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가장 감정적으로 민감한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는 예언자의 동료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부터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기 때문에 다소 격렬한 내용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양측의 해석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 대해 먼저 시아파의 관점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시아파 무슬림은 사하바(예언자의 동료)들을 선택적으로 존중합니다. 아부 다르, 살만 알-파르시, 미크다와 같은 사하바들은 알리와 예언자의 가족에게 충성했기 때문에 깊이 존경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강하게 비판하는 사하바들도 있습니다. 아부 바크르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가 알리의 신성한 권리를 찬탈하고 파티마로부터 파다크 땅을 빼앗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의 딸 파티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히흐 부하리에도 나와 있듯이, 파티마는 아부 바크르에게 분노한 채 세상을 떠났고, 죽을 때까지 그와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우마르가 사키파 사건에서 공모했다고 비난하고, 예언자의 아내 아이샤가 자말 전투에서 알리를 상대로 군대를 이끌었다고 비난합니다. 그 전투에서 1만에서 2만 명의 무슬림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니파 역사가 타바리에 따르면, 알리가 암살당했을 때 아이샤는 엎드려 절했다고 합니다.

감사의 표시로, 그들은 무아위야가 시핀 전투에서 알리와 싸웠고, 이후 이맘 하산을 독살했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수니파 주류에서는 이맘 하산이 그의 아내 자다 빈트 알 아샤드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주장하며, 많은 수니파 역사가들은 그녀가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얀의 영향력 아래 있었거나 보상을 약속받았다고 언급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수니파 사료에서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반면 시아파는 그녀가 무아위야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현대 시아파의 입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야톨라 하메네이는 2010년에 사하바(예언자의 동료)를 공개적으로 저주하는 것은 하람(금지된 행위)이라는 파트와(종교적 칙령)를 발표했습니다. 아야톨라 시스타니는 무슬림 간의 분열을 야기하는 저주는 금지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증오가 아닌 역사적 비판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제 완전히 정반대인 수니파의 관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니파 무슬림은 모든 주요 동료들을 최고의 존경 대상으로 여기며,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를 특히 높이 평가합니다.

그들은 네 명의 정통 칼리프를 존경합니다. 그리고 아이샤를 신자들의 어머니로 여깁니다. 예언자께서 "내 동료들을 모욕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디스를 인용하며, 동료들을 저주하는 것을 중대한 죄, 심지어는 쿠프르(불신)로 간주합니다. 또한 알리가 아들들의 이름을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로 지은 것을 보면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 차이점은 살라(기도)와 금식입니다. 그들이 실제로 예배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모스크에 들어가 보면, 기도하는 모습만 봐도 누가 수니파이고 누가 시아파인지 알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문화적 선호의 차이가 아니라, 예언자 무함마드의 실제 행적에 대한 완전히 다른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시아파의 기도 방식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시아파 무슬림은 서서 기도할 때 팔을 자연스럽게 옆구리에 붙이고 손을 모으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것은 이슬람 초기 예언자께서 취하셨던 원래의 자세였습니다." 하지만 가장 유명한 차이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시아파 무슬림들은 절을 할 때 이마를 카펫에 직접 대지 않습니다. 대신, 투르바라고 불리는 작은 점토판 위에 절을 하는데, 이 점토는 가급적이면 이맘 후세인이 순교한 카르발라에서 가져온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예언자께서 카펫이 아닌 자연 흙 위에 절을 하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사히흐 부하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수니파 서적인 이 책에는 예언자의 동료들이 더운 날 손에 조약돌을 쥐고 식힌 다음 그 위에 엎드려 절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아파는 "보시다시피, 자연물에 엎드려 절하는 것이 원래의 관습이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시아파는 기도를 합쳐서 드립니다. 두루마 기도와 아스르 기도를 함께, 마그립 기도와 이샤 기도를 함께 드립니다. 즉, 하루에 다섯 번 따로 기도하는 대신 세 번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는 기도 횟수 감소를 언급하는 꾸란 구절에 근거합니다. 해가 뜬 순간부터 밤이 될 때까지를 세 번의 주요 기도 시간으로 해석합니다.

이제 수니파 무슬림의 기도 방식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수니파 무슬림은 기도할 때 오른손을 왼손 위에 얹고 가슴이나 배꼽 아래에 놓습니다. 이는 그들이 따르는 마드하브(법학파)에 따라 다릅니다. 그리고 기도 매트나 카펫에 직접 엎드려 절합니다. 하루에 다섯 번 따로 기도하며, 여행 중이거나 특별한 상황에서만 기도를 합쳐서 드립니다.

이 관습은 주로 한발리파와 샤피이파에서 특정 조건 하에 허용되며, 일상적인 관행은 아닙니다. 그리고 예언자께서 다섯 가지의 뚜렷한 기도 시간을 정하셨고, 각 시간은 특정 시간대에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우두(세정)를 할 때 수니파 무슬림은 발을 씻지만, 시아파 무슬림은 꾸란 구절을 다르게 해석하기 때문에 발을 씻는 대신 닦습니다. 라마단 기간 동안 또 다른 차이점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실제로 이는 사람들이 단식을 끝내는 시간에 영향을 미칩니다. 시아파 무슬림은 수니파보다 약 10분에서 30분 늦게 단식을 끝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니파는 해가 지평선에서 사라지자마자 단식을 끝내지만, 시아파는 완전히 어두워지고 동쪽 하늘의 붉은 기운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따라서 라마단 기간 동안 같은 도시에 사는 수니파와 시아파 가족들이 서로 다른 시간에 단식을 끝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그리브 시간이 실제로 언제 시작되는지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릅니다. 양측 모두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문헌적 증거를 제시합니다.

여덟 번째 차이점은 결혼 방식입니다.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가장 논란이 되는 실질적인 차이점 중 하나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바로 결혼, 특히 무타(mutah), 즉 임시 결혼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추상적인 신학적 논쟁이 아닙니다. 특정 결혼 계약의 종류는 할랄인지 하람인지에 따라 다릅니다. 먼저 시아파의 입장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시아파 무슬림은 수니파와 마찬가지로 영구적인 결혼을 합니다. 하지만 무타라고 불리는 임시 결혼도 허용합니다. 무타는 정해진 기간 동안 유지되는 결혼 계약으로, 짧게는 몇 시간에서 길게는 몇 달 또는 몇 년까지 지속될 수 있습니다. 부부는 지참금과 결혼 기간에 대해 합의합니다. 그리고 정해진 기간이 만료되면 결혼은 자동으로 종료됩니다.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것이 허용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무타(임시 결혼)를 언급하는 꾸란 4장 24절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들에게서 얻는 모든 것에 대해 마땅한 대가를 지불하라." 시아파는 '얻는 것'을 무타의 증거로 해석하는 반면, 수니파는 이를 무타가 아닌 일반적인 결혼으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관습은 예언자 무함마드 시대에도 존재했으며, 수니파와 시아파 모두 당시에도 행해졌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언자 무함마드께서 직접 무타(결혼)를 금지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2대 칼리프인 우마르가 수년 후에 이를 금지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알라와 그분의 사도께서 금지하지 않으셨으므로 우마르에게는 이를 금지할 권한이 없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무타는 여전히 허용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수니파의 입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수니파는 이러한 관행을 완전히 거부합니다. 수니파 무슬림은 무타를 엄격히 금지하며 간음과 동일시합니다. 그리고 모든 무타 계약을 간음으로 간주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법률 체계에 근본적인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시아파 무슬림에게는 이것이 유효한 결혼 형태이지만, 수니파에게는 중대한 죄악입니다.

아홉 번째 차이점: 아슈라와 카르발라. 이제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가장 감정적으로 격렬한 차이점 중 하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바로 무하람월 10일, 아슈라에 관한 것입니다. 시아파에게 이 날은 그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하지만 수니파에게는 완전히 다릅니다. 시아파의 관점부터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래야만 당시 상황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기 680년 무하람 10일, 이라크의 카르발라라는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한쪽에는 예언자의 손자인 후세인이 72명의 동료와 가족, 그리고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한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야지드의 군대 수천 명이 있었습니다.
우마이야 칼리프의 군대는 후세인과 그의 추종자들을 포위했습니다. 그리고 사막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며칠 동안 물 공급을 차단했습니다. 아이들은 목이 말라 울부짖었습니다. 후세인의 생후 6개월 된 아기 알리 아스가르는 후세인이 물을 애원하며 안고 있는 동안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고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후세인의 동료 72명이 모두 살해당했습니다. 후세인 자신도 참수당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말에 짓밟혔습니다. 그의 머리는 잘려 나갔습니다.

그리고 야지드의 전리품으로 다마스쿠스로 옮겨졌습니다. 시아파 무슬림에게 이것은 단순한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폭정과 억압에 맞서 싸우기 위해 예언자의 혈통이 치른 궁극적인 희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년 아슈라에는 시아파 무슬림들이 검은 옷을 입고 대규모 행렬을 벌입니다. 그들은 슬픔을 표현하며 울고 가슴을 칩니다. 그리고 이 날은 금식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아슈라는 축하의 날이 아니라 비극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슈라 후 40일 동안 아르바인이라는 행사가 있는데, 2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카르발라까지 걸어갑니다. 그중 많은 사람들이 80킬로미터를 걸어서 갑니다. 이것은 실제로 지구상에서 가장 큰 연례 순례이며, 하즈보다도 규모가 큽니다. 이제 수니파의 관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중요한데, 수니파는 카르발라에서 일어난 일을 절대적으로 비난하기 때문입니다. 수니파 무슬림들은 후세인이 잔혹하게 순교했다는 점과 그것이 엄청난 불의였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후세인을 고귀한 동반자이자 예언자로 사랑받는 손자였던 야지드는 압제에 맞서 싸우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의견 차이가 생깁니다. 수니파는 야지드에 대해 복잡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 일부 수니파 학자들은 야지드가 비판받아야 할 폭군이긴 하지만 저주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특히 고전 수니파 학자들은 야지드를 악인으로 규정하고 후세인 살해를 포함한 세 가지 주요 범죄의 책임자로 지목했습니다.

야지드의 아버지인 무아위야는 주류 수니파 무슬림들에게 예언자의 동반자로서 존경받습니다. 비록 그가 정치적 실수를 저지르고 알리와 싸웠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동반자를 저주할 수는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그의 행동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합니다. 수니파는 아슈라 날에 금식하는데, 이는 예언자 무함마드께서 이 날 금식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아슈라 날은 알라께서 예언자 모세와 그의 자손들을 구원하신 날로 기념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로부터 홍해를 갈라 승리한 것처럼, 수니파는 후세인을 순교자로 존경하고 그의 죽음을 규탄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시아파와 같은 애도 의식을 치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슈라를 주로 금식하고 알라께 감사하는 날로 여깁니다. 이러한 차이가 아슈라에 대한 완전히 다른 감정적 관계를 형성합니다.

10번째 차이점: 순례. 하즈와 지아라. 이제 순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 부분은 수니파와 시아파가 완전히 일치하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차이점이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형의 순례는 주요한 신학적 분열을 야기합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카르발라와 나자프 같은 도시에는 황금 돔이 있지만 대부분의 수니파 도시에는 없는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먼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니파와 시아파 모두 메카 순례(하지)가 이슬람의 필수적인 기둥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매년 하지 기간 동안 메카에서는 수니파와 시아파 신자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은 카바를 돌며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신을 믿고 똑같은 의식을 행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차이가 발생합니다. 시아파 무슬림은 '지아라'라고 불리는 추가적인 의식을 행하는데, 이는 12 이맘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아파에게 이것은 단순한 문화적 전통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하즈 순례와 동등한 의미를 지닌, 매우 중요한 예배 행위로 여겨집니다. 가장 중요한 묘소는 후세인의 묘소입니다.

카르발라에 있는 거대한 황금 돔의 무덤과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나자프에 있는 알리의 무덤. 매년 수백만 명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 성지들을 참배하고 기도하며 축복과 중재를 구하기 위해 이 도시들을 방문합니다. 그들은 성지에서 기도하고 간청하며 이맘에게 자신들을 위해 알라께 중재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축복받은 성지 가까이에 있는 것이 엄청난 영적 이득을 가져다준다고 믿습니다.

무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수니파의 입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니파 무슬림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족을 절대적으로 존중합니다. 그리고 알리와 후세인이 예언자의 고귀한 동반자이자 가족 구성원이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무덤 위에 화려한 사당을 짓고 그곳에서 기도하는 행위에는 신학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들은 이러한 행위가 알라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 즉 시르크(우상숭배)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기도는 오직 알라께 직접, 어떠한 중개자도 없이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황금 돔을 짓고 죽은 자에게 중재를 구하는 것이 타우히드(유일신 신앙)의 핵심 원칙에 어긋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니파가 지배적인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카르발라, 나자프, 쿰과 같은 시아파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황금 돔과는 달리 정교한 사당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두 집단 모두 메카 순례를 하지만, 시아파만이 이맘의 사당에 대한 추가 순례를 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반영합니다. 중재와 예언자 가족의 역할에 대한 완전히 다른 이해.

차이점 11: 하위 그룹. 그룹 내의 세분화.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수니파와 시아파라고 말할 때, 실제로는 매우 큰 범주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그룹 내에는 고유한 신념과 관행을 가진 여러 하위 종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점 중 일부는 수니파와 시아파라는 주요 분열만큼이나 큽니다.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시아파의 하위 분파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정말 흥미로운 주제인데요. 가장 큰 분파는 단연 12이맘파로, 전체 시아파의 약 85%를 차지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해 온 바로 그 분파죠. 이들은 12이맘을 믿으며, 마지막 이맘은 현재 은둔 중인 무함마드 알마흐디라고 생각합니다. 이란, 이라크, 바레인 같은 나라들은 12이맘파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6번째 이맘 이후에 분파를 이끈 이스마일파 시아파도 있습니다. 이들은 12이맘파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다른 계승 노선이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유명한 이스마일파는 49대 이맘으로 여겨지는 아가 칸의 추종자들입니다. 현 아가 칸은 프랑스에 거주하는 억만장자이며, 전 세계적으로 약 1,500만 명의 추종자를 두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역사책에서 읽을 수 있는 중세 암살자들이 사실은 극단적인 이스마일파 종파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로 예멘에 있는 자이디 시아파도 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자이디파는 12인 시아파보다는 수니파에 더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무오류의 이맘을 믿지 않고, 초대 칼리프 세 명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와 싸우고 있는 예멘의 후티 반군은 자이디파입니다. 이제 수니파의 하위 종파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수니파 역시 매우 다양합니다. 대다수의 수니파는 이슬람 법학의 네 가지 학파, 즉 하나피 학파 중 하나를 따릅니다. 하나피 학파는 가장 규모가 크며 터키, 남아시아, 중앙아시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다음은 말리키 학파입니다.

수니파는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에, 샤피이파는 동남아시아와 동아프리카, 그리고 중동에 있습니다. 한발리파는 가장 규모가 작고 보수적인 학파이며,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식 학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많은 수니파 종파는 예언자의 묘소를 방문하거나 그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것을 매우 엄격하게 금지하는데, 이는 이러한 행위를 비드아(بدعة, 이슬람에서 금지된 새로운 종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피파와 같은 다른 수니파 종파는 정교한 성지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울리드를 기념하고 신비주의를 실천합니다. 따라서 둘 다 엄밀히 말하면 수니파 무슬림이지만 완전히 다른 관습을 따르는 두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으면, 사실 답은 겉보기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왜냐하면 먼저 "어떤 유형의 수니파와 어떤 유형의 시아파를 비교하는 것인가?"라는 질문부터 던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12. 현대 지정학. 이란 대 사우디아라비아. 자, 지금까지 이 모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신학적, 역사적 차이점도 있지만, 이제 우리는 1400년 동안 이어져 온 이 분열이 오늘날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분쟁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면 예멘이 왜 폭격을 당하는지, 시리아가 왜 내전을 겪었는지, 이라크가 2003년 이후 왜 분열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James Park]]></author>
			<pubDate>Wed, 29 Apr 2026 18:15:0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jamespage.org/?kboard_redirect=7"><![CDATA[자료실]]></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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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To be happy for a lifetime: There is a saying, “Be hones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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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img src="https://jamespage.org/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2/202604/69f24442f094a6998637.jpeg" alt="" />

오늘부터 아예 세 물 bottle을 테이블위에 놓고 물을 마시고 있다. 오랜간 자기전후에 갈증이 심했고 건강 checkup 결과 몸안에 당분이 조금 높게 있었기에 물이 몸안에 부족한 것을 알았고 실지로 추천된 양의 물을 마시니 자기전후 갈증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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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 한인교회에 다닐때 가장 행복하게 세상을 떠나는 것이 잘 때 떠나는 것이라고 누가 말을 했는데 사람이 잠을 자는 자세로 새벽 12시부터 6시까지 숨을 거둘 수 있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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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 자는 자세는 목과 허리의 척추 자연스러운 곡선(C자형)을 무너뜨려 심한 목·허리 통증과 디스크를 유발하고, 안압을 높여 녹내장 위험을 키우며, 척추 변형, 소화 불량, 얼굴 주름 및 비대칭을 유발하여 건강에 '최악'의 수면 자세로 평가되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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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를 보고 똑바로 자는 자세는 척추 정렬과 체중 분산에 좋지만, 중력으로 인해 혀와 목젖이 뒤로 밀려 기도를 좁게 만들어 코골이나 수면무호흡증을 악화시킬 수 있고 식도 하부 괄약근의 압력을 낮춰 위산 역류를 유발할 수 있으며 혀가 뒤로 밀려 기도를 막을 수 있어 호흡기 질환자에게는 부적합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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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으로 자면 안 되는 이유는 주로 위산 역류, 심장 압박, 그리고 임산부의 혈액순환 때문이다. 위가 왼쪽에 위치해 있어 오른쪽으로 누우면 위산이 식도로 역류하기 쉽고, 혈관 구조상 심장에 부담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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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왼쪽으로 자는 것을 권장하는데 왼쪽으로 누워 자는 자세는 위산 역류 완화, 소화 기능 개선, 혈액 순환 원활 및 임산부의 태아 혈류 공급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심장이 왼쪽에 위치하여 부담이 적고, 코골이 완화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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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자주 위산과다로 음식을 먹기 전 후 약을 먹고는 했는데 왼쪽으로 눕고 자니 그 문제가 별로 부상되지않고 있다. 그리고 다리 사이에 베개를 끼고 자니 한결 나은 것 같다. 물을 평소보다 많이 마시니 화장실에 자주 가야하는 불편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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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영국의 왕이 여왕과 함께 백악관을 찾아왔다. 의회에 가서 말도 했는데 아마 최근 미국과 영국의 사이가 벌어지려는 것을 막기 위함일 것이다.

영국 속담에
<strong>하루가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라”</strong>
<strong>일주일이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라”</strong>
<strong>한 달이 행복하려면: “말을 사라(여행을 하라)”</strong>
<strong>일 년이 행복하려면: “새집을 지어라”</strong>
<strong>일평생 행복하려면: “정직하라”는 말이 있다</strong>고 한다.
왜 정직하면 일평생이 행복할까? 아마 내가 남의 삶을 부러워하여 거짓으로 몸치장을 하지않고 나자신을 정직하게 있는대로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으니 부담이 없어 행복하고, 남에게 정직하니 관계가 좋아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있는 그대로 남에게 보이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특히 한국과 같이 집단적인 사회에서는 말이다.
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은 죄를 지은 후에 나의 부끄러움을 크게 보는 존재로 나는 나의 몸을 감추어야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담이 벗은 몸을 가리는 것과 같이 난 몸을 감추려고 때로 정직하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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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정에 부채가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한 가정에 일년 버는 돈의 두배이상의 빚을 지고 있으니 말이다. 일본의 3배가 넘고 미국의 두배가 된다. "황새 쫓다 뱁새 다리 찢어진다"말이 기억난다. 황새는 황새이기에 칭찬하고 인정하고 부러워하지 말고 나는 뱁새로 살면 되는데 말이다

<strong>“한국에서 일하던 서양인 여성 한 명이 했던 말이 기억나네요. 자기 한국인 동료가 꿈에 그리던 명품 가방을 사려고 한 달 내내 라면만 먹었다고요... 정말 미친 일이죠.”</strong>

<strong>“부자로 보이고자 애쓰다 재정적 파탄에 이르는 것은, 인간이 벌이는 게임 중 단연코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strong>

<strong>“사치품을 사느라 빚을 진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 또한 사치품을 사느라 빚을 진다?”</strong>

키에르케고르는 일기에 “군중은 진리가 아니다.”라고 기록했다. 이는 모두가 옳다고 해서 옳은 것이 아니며, 모두가 웃는다고 해서 웃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군중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타인의 기대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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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군중의 문제를 지적하며, 개인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신은 선택해야 합니다. 당신은 책임져야 합니다. 당신은 당신으로 살아야 합니다.”라고 강조하며, 개인의 자율성과 책임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쇼펜하우어는 여자를 속물이라고 말하면서 속물은 “진리가 아닌 진리를 진리라고 쫒는자“라고 말했다. 사람들 눈에 인정을 받으려고 없는 돈을 카드로 긁고 사니 빚더미를 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에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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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는 1849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는데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절망으로 말했다.
그는 절망을 네가지 형태로 구분했다.

<strong>첫째는 자기가 자기자신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절망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다.</strong>

<strong>둘째는 열심히 살아가는데 문득 멈춰 서면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가장 심각한 절망은 자신이 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절망이다.</strong>

<strong>셋째는 절망적으로 자기 자신임을 거부하는 절망이다. 나는 이러한 내가 싫다. 도피,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strong>

<strong>넷째는 절망적으로 자기 자신임을 고집하는 절망이다고 그는 말한다.</strong>

난 부채가 없이 산다. 집, 차, 보트, RV값도 payoff 되어있다. 돈이 더 필요하지 않고 부러워 할 사람도 없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내 기억에는 잘 정리가 되어있다. 그러니 누구의 삶을 부러워하지않고 나의 삶에 더 충실할 수가 있는 것 같다.]]></description>
			<author><![CDATA[James Park]]></author>
			<pubDate>Wed, 29 Apr 2026 17:47:1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jamespage.org/?kboard_redirect=2"><![CDATA[한주간 배우며 생각한다]]></category>
		</item>
				<item>
			<title><![CDATA[My son mentioned that they’re now planning to have a baby.]]></title>
			<link><![CDATA[https://jamespage.org/?kboard_content_redirect=408]]></link>
			<description><![CDATA[지난 주말에는 아내가 교회에 가서 4시간동안 여성 쎄미나에 참석했었다. 제목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아내는 여러 교인들을 알게 되고 나름대로 배운 것도 있었다고 말했다. 교회가 3마일 가까이 있으니 내가 ride주는 것도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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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C에는 교인수가 200명이 될까? 거의 백인들이고 예상외로 애들이 어린 젊은 층이 많다. 핸디캡 파킹장을 쓰는 교인들이 거의 없으니 말이다. 또 동양인은 우리밖에 없는 것 같다. 아내는 얘기거리를 찾아 교인들과 잘 교제하는데 아직 나는 좀 못하는 것 같다. 애기를 밴 아내를 가진 Seth가 예배후 내옆자리에 왔는데 힐 말을 찾지 못해 5월에 Discovery class에 join한다고 말했다. 왜 애들이 몇명이냐? 아들이 세상에 나올텐데 exciting 하지 않냐? 하고 말을 하지 못했는지 그들의 세계를 좀 더 세밀히 관찰해 얘기거리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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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토요일에는 교회청소를 한다고 e메일을 받아 집에 있는 gas leaf blower를 가져가고 아내와 도울 일을 찾아 같이 할 생각이다. 한인교회에 다닐때는 전혀 참석을 하지않았지만 이제 마음이 열리는 것 같다.
미국인교회 교인들속에 동양인으로 앉아 있으면 그들은 나를 adopt된 형제로 볼려고 할 것이다. 만약 한인교회에 미국인이 앉아있으면 형제로 보다 피부색깔이 다른 인종으로 보는 경향이 더 강할 것이기에 한인교회에는 백인들이나 흑인들이 형제로 survive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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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들에게 동양인이 어떤지 좋은 이미지를 보이고 그들의 형제로 부족함이 없이 살아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에게 문제가 있으면 그들이 내게 도움이 되고 또 우리도 그들에게 도움이 되어야할 것이다.
나나 아내가 미국사회 교회에서 생활하니 아들과 그의 아내와 같은 사회 환경속에서 더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동양사람들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좀 꺼리는 것 같다. 아니 그들만이 아니라 대부분 젊은 한인들이 나이든 어른들과 거리를 둘려고 하는 것으로 안다. 쓸데없는 예의니 뭐니를 강조하고 무엇보다 듣는 귀보다 말하는 입의 혀가 세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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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아들에게 큰매형을 식당에서 만나는데 올 수 있으면 오라고 했는데 그는 답도 하지 않았다. 아마 아들은 나이든 한국인들이 사람을 어느 학교에 다니냐로 판단하는 것을 알고 싫어하는 것 같다.
아들과 며느리는 한두주전까지 벤츠, BMW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며느리는 벤츠를 trade in해서 Tesla model Y로 바꾸었고 아들은 BMW를 팔아서 차가 없는데 지난번에 만났을때 엄마가 은퇴하면 차가 필요없을지 모르니 Acura TL을 자기에게 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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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들이 현실적으로 가정을 가질 준비를 하고 spending을 적게 하려고 하는구나 생각하니 좋았다. Acura TL의 현재 mileage는 180K를 넘었지만 auto mechanic은 300K까지 탈 수 있다고 말한다. 난 그에게 Blue Book에는 $4000정도 하지만 $1500에 팔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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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난 믿을 수 있는 auto mechanic 친구에게 몇가지 고칠 생각으로 연락을 했다. 난 그에게 쎈서들을 함께 check해달라고 부탁하고 transfer case fluid와 differential fluid는 내가 새 fluid로 갈 생각이다.
이제 5월이 되면 엄마날 그리고 아빠날에 아들부부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6월초에는 아내 생일이기에 또 만난다. 그들은 고급식당에 부모를 모시려고 하는데 난 솔직히 비싼 식당에서 먹는 것이 싫다. 써비스는 좋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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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4번째 갔었던 고급식당에 갔었다. 전보다 실내장식이나 써비스가 더 세련되게 보였다. 큰매형과 그의 새 아내를 만나 식사했는데 좋았지만 다 먹고 나니 배가 차지않았고 좀 거북스러웠다. 한 $200은 pay했지만 미국식 wagyu고기 맛도 기름이 많아 그져 그랬다. 해서 아들부부에게도 식당에 갈때 샤브 샤브나 짜장면이나 짬뽕 먹는 곳에 가자고 하려고 한다. 비싼 곳에 갈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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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며느리는 부모가 그들의 삶에 간섭을 하지않고 자기들에게 도움만 주려고 하니 좋아하는 것 같다. 지난번에 만났을때는 이제 자녀를 가질 준비를 한다고 말했다. 솔직히 난 그들이 자녀를 가지고 내게는 손자 손녀가 생긴다고 기뻐하는 마음보다는 자녀 낳아 키우는 것이 보통일이 아닐 것이다 라는 생각을 우선 가지게 된다. 한국의 출산율이 0.7이라고 난리인데 충분히 이해가 된다. 아마 아들부부가 자녀를 가지게 되면 그들은 개부터 맡아달라고 부탁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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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혼자 하루를 유익하게 보낼 생각을 한다. Peace를 부르니 내 무릎위에 앉았다. 그저께 입밑의 목에 tick이 붙어있어 핀셋으로 집어 없애려고 난리를 벌였다. 하도 손을 물려고 해서 입을 못 열게 줄로 감고 발악하는 그를 붙잡고 말이다. 그는 눈물에 콧물에 얼굴이 범벅이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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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갈지 모르는 인생, 숨을 쉬며 미국에 살면서 그들과 함께 살아 무엇인가 함께하고 아내와 은퇴뒤의 삶을 계획하면서 오늘도 불편없이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한없이 God에게 고맙게 생각된다.]]></description>
			<author><![CDATA[James Park]]></author>
			<pubDate>Mon, 27 Apr 2026 15:01:0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jamespage.org/?kboard_redirect=1"><![CDATA[오늘의 단상]]></category>
		</item>
				<item>
			<title><![CDATA[“12 Table Manners That Instantly Separate Upper Class from Middle Class.”]]></title>
			<link><![CDATA[https://jamespage.org/?kboard_content_redirect=407]]></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jamespage.org/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2/202604/69ebad0b68e8d1294893.jpeg" alt="" />

어제는 멀지않은 곳에 2박 3일로 금년 처음 캠핑을 갔었다. 아내는 음식을 챙겼고 나는 RV trailer를 캠핑장으로 옮겨 Back in 하면서 level을 맞추었고 parking하고 물과 전기를 연결하는 작업을 하는데 별로 시간을 오래 쓰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죽은 나무들을 모아서 오후 4시쯤되어서 camp fire를 했는데 아내는 고기를 불에 구어서 저녁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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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V가 작아서 highway를 달리거나 뒤로 parking하는데 어렵지 않다. 하지만 화장실이 작고 세면대로 쓰는 sink가 작아 불편할 때가 많지만 돈이 있다고 해도 더 큰 RV로 바꿀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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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y market에 10에이커의 땅을 가지고 살고 있는 Y형에게 그의 집에 RV를 가져갈테니 전기와 물 sewer를 만들면 좋겠다고 반 농담으로 말했는데 그는 시간이 되면 정말 집옆에 뜰에 RV park처럼 만들 생각인지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는 키가 높은 Benz cargo Van을 사서 RV로 만들었고 친구인 K형도 같은 Van RV를 가지고 있어서 캠핑을 다니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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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제 YouTube로 우연히 보게된 “12 Table Manners That Instantly Separate Upper Class from Middle Class.”의 영상을 다시 보았다. 난 음식을 먹을때 짐승같이 소리를 내는 것과 서로 시끄럽게 말하는 것만 싫어했는데 그외에 모르게 지키지않았던 여러개를 듣고 고칠 생각을 하면서 나아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table manners를 upper class와 같이 지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manner이기에 말이다.
아들이 배우자를 찾을때 여자의 식사 manner를 보았던 이유를 알 것 같다.

<strong>12: THEY WAIT TO EAT UNTIL EVERYONE AT THE TABLE HAS BEEN SERVED</strong>

12번째 예절은 식탁에 앉은 모든 사람이 음식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상류층 사람들은 절대 먼저 식사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음식이 나오자마자 그들은 기다립니다. 식탁에 앉은 모든 사람이 음식을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먹기 시작합니다. 음식이 식어가고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먼저 먹으라고 재촉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들은 기다립니다. 왜일까요? 공동 식사는 개인적인 소비가 아니라 함께 나누는 경험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먹기 시작하는 것은 "나의 편안함이 집단의 결속보다 더 중요하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단, 누군가의 음식이 특별한 경우라면 예외입니다. 10분 이상 늦어지고, 그들이 진심으로 먼저 먹으라고 재촉하면, 먹기 시작해도 좋지만 천천히 먹고 자주 멈춰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막 먹기 시작할 때 당신이 다 먹어버리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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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THEY KEEP THEIR HANDS VISIBLE ON THE TABLE.

열한 번째 예절은 바로 손을 테이블 위에 보이게 두는 것입니다. 식사 중이 아닐 때는 절대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지 않습니다.
이는 유럽식 격식 있는 식사 예절로, 미국 상류층 가정에서는 일반적이지만 대부분의 중산층 가정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상류층 사람들은 식사 중이 아닐 때는 손목을 테이블 가장자리에 올려놓고 손을 편안하게 둔 채 테이블 위에 보이게 둡니다. 절대로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지 않습니다.

10: THEY NEVER CUT MORE THAN TWO
BITES OF FOOD AT A TIME

10번째 예절은 그들이 한 번에 두 입 이상 음식을 잘라 먹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테이크, 닭가슴살, 생선 등을 한 번에 한입 크기로 잘라서 마치 부모가 미리 잘라준 음식을 먹는 아이처럼 조금씩 먹는다. 하지만 상류층은 최대 한두 입만 잘라서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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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THEY PLACE THEIR NAPKIN ON THEIR CHAIR WHEL LEAVING MID-MEAL (NEVER ON THE TABLE

아홉 번째 예절은 식사 중간에 자리를 뜰 때 냅킨을 의자 위에 놓는 것입니다. 절대 테이블 위에 놓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절을 익힌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무언의 신호입니다.
상류층 사람들은 식사 중 화장실, 전화 통화 등 어떤 이유로든 자리를 비울 때 냅킨을 테이블이 아닌 의자 위에 느슨하게 놓습니다. 의자 위에 냅킨을 놓는 것은 "잠시 후에 돌아오니 자리를 치우지 마세요"라는 의미이고, 테이블 위에 냅킨을 놓는 것은 "식사를 마쳤으니 자리를 치우셔도 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돌아올 때는 의자에서 냅킨을 집어 무릎 위에 다시 놓습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지켜지고 있는 고전적인 유럽식 식사 예절입니다.

<strong>8: THEY NEVER SEASON FOOD BEFORE</strong> <strong>TASTING IT</strong>

여덟 번째 예절은 음식을 맛보기 전에는 절대 소금이나 후추를 음식에 뿌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상류층 사람들은 소금이나 후추를 넣기 전에 항상 음식의 맛을 봅니다.
왜냐하면 맛보기 전에 간을 하는 것은 요리사를 모욕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맛보기도 전에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거나 누군가의 집에서 요리해 준 음식을 대접받을 때, 이는 상당한 무례로 여겨집니다. 또한 "나는 정보 없이 결정을 내리고, 분별력보다는 습관에 의존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먼저 맛을 보고 필요에 따라 간을 하는 것은 "나는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기 전에 판단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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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THEY USE THE SILVERWARE FROM THE OUTSIDE IN (AND KNOW WHAT EACH PIECE IS FOR)

일곱 번째 예절은 식기를 바깥쪽부터 안쪽으로 사용하고, 각 식기의 용도를 아는 것입니다. 격식 있는 식탁 세팅은 중산층에게 위압감을 주는데, 그 규칙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식기는 바깥쪽부터 접시 쪽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strong>6: THEY NEVER REACH ACROSS SOMEONE OR ACROSS THE TABLE</strong>

여섯 번째 예절은 절대 상대방이나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류층 사람들은 소금이 식탁 저편에 있더라도, 불과 30cm밖에 떨어져 있지 않더라도 함부로 손을 뻗지 않습니다. "소금 좀 건네주시겠어요?"라고 묻고 소금을 건네받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다른 사람의 접시나 개인 공간을 침범하여 소금을 집는 행위는 격식 있는 자리에서 공격적이고 무례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내 필요가 사회적 예절보다 우선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반대로 정중하게 요청하는 것은 "나는 경계를 존중하고, 공동 식사 문화를 이해합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건네주면, 감사 인사를 하고 사용한 후에는 다시 돌려주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권한 뒤 내려놓아야 합니다. 상류층은 "필요한 물건을 좀 빌려주시겠어요?"라고 신호를 보내고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립니다.

5: THEY KEEP THEIR ELBOWS OFF THE TABLE WHILE EATING (BUT REST WRISTS BETWEEN COURSES)

다섯 번째 예절은 식사 중에는 팔꿈치를 테이블에서 떼고, 코스 사이에는 손목을 올려놓는 것입니다.
모두가 알지만 대부분 잘못 알고 있는 규칙이 있습니다. 식사 중에는 팔꿈치를 식탁에서 떼야 합니다. 손목만 식탁 가장자리에 가볍게 올려놓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한 코스를 다 먹고 다음 코스가 나오기 전까지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팔꿈치를 식탁에 올려놓아도 괜찮습니다. 이때만 팔꿈치를 올려놓는 것이 허용됩니다. 하지만 음식이 나오는 순간, 팔꿈치는 식탁에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식사 중에는 팔꿈치를 식탁에 올려놓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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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4: THEY PACE THEIR EATING TO MATCH THE SLOWEST PERSON AT THE TABLE</strong>

네 번째 예절은 테이블에서 가장 느리게 먹는 사람의 속도에 맞춰 식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진정한 사회적 감각을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상류층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식사를 훨씬 빨리 또는 늦게 마치는 법이 없습니다. 가장 느리게 먹는 사람에게 맞춰 속도를 조절합니다. 할머니가 천천히 드시면 모두 속도를 늦추고, 아이가 조심스럽게 먹으면 식탁 분위기를 바꿉니다. 이는 접시에서 눈을 떼고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며 식사 속도를 조절하는 등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는 것도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식사하는 동안 빈 접시를 들고 있는 것은 "나 다 먹었어, 기다리게 하지 마"라는 신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5분 동안 다 먹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식사를 마치는 것은 "나는 사회적 역학 관계에 무관심해"라는 신호입니다. 함께 식사를 마치는 것은 "나는 그룹에 맞춰 식사하고, 식사는 공유된 경험이라고 생각해"라는 신호입니다. 중산층은 "개인적인 속도로 식사하고, 그룹의 식사 시간에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먼저 또는 늦게 식사를 마치는 것"을 통해 이를 표현합니다.

<strong>3: THEY NEVER DISCUSS MONEY, DIETS, DIGESTIVE ISSUES, OR POLITICS AT THE TABLE</strong>

세 번째 예절로 상류층 사람들은 식탁에서 절대 꺼내지 않는 네 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돈, 다이어트, 신체 기능, 그리고 정치다. 돈, 가격, 급여 비용은 천박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소화 문제, 위장이나 화장실 등에 관한 이야기는 부적절합니다. 정치 이야기는 갈등을 초래합니다. 안전한 주제로는 여행, 책, 예술, 시사, 비정치적인 이야기, 공통된 경험, 다른 사람의 관심사에 대한 질문 등이 있습니다. 식탁 대화의 목표는 모든 사람이 편안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 자신의 제약이나 논란이 될 만한 의견을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산층은 "식당 가격이 얼마나 비싼지 이야기하는 것"을 예로 듭니다.
상류층의 신호는 "불편함을 피하고, 다른 사람의 경험을 묻고, 주제를 가볍고 흥미롭게 유지하며, 편안하고 포용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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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2: THEY ALWAYS THANK THE SERVER AND MAKE BRIEF EYE CONTACT BUT NEVER INTERRUPT OTHERS TO DO SO</strong>

두 번째 예절은 항상 종업원에게 감사를 표하고 짧게 눈을 마주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절대 다른 사람의 말을 끊지 않습니다. 상류층은 서비스 직원을 존중합니다. 항상 "부탁합니다"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짧게 눈을 마주치며 그들을 사람으로 존중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끊고 서비스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대화가 자연스럽게 멈추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직원이 자리를 떠날 때 "감사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나는 서비스 직원을 존중하지만, 내 테이블에서의 대화 흐름도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잔을 채워줄 때마다 과도하게 감사 인사를 하거나 말을 멈추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감사 인사를 전혀 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무례한 행동입니다.

1: THEY WAIT FOR THE HOST TO BEGIN EATING BEFORE ANYONE ELSE STARTS

첫 번째는 공식적인 식사 위계와 존중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식당이든 가정집이든, 어떤 식사 자리에서든 주인이 먼저 식사를 시작해야 합니다. 주인이 첫 입을 먹은 후에야 다른 사람들이 식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인이 식사를 마쳤다는 신호를 줄 때까지는 식사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식탁을 차리는 등의 방법으로 말이죠.
"저는 주인의 리더십을 존중하고, 격식 있는 식사 예절을 알고 있습니다." "주인을 관찰하고, 주인이 첫 입을 먹는 것을 기다리고, 주인이 식사를 마쳤다는 신호를 보낼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고, 우아하게 주인의 행동을 따르며, 사회적 위계질서를 존중하는 것"을 식사 예절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12가지 식사 예절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것들이 임의적인 규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상류층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누가 이 규칙을 이해하는지 판단하는 데 사용하는 사회적 언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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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할때 Table manner는 성경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배울 점이 있고 manner를 지키면서 upper class로 보이게 행동하는 사람은 다시 보게 된다. 돈이 많거나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말이다.]]></description>
			<author><![CDATA[James Park]]></author>
			<pubDate>Fri, 24 Apr 2026 17:53:3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jamespage.org/?kboard_redirect=2"><![CDATA[한주간 배우며 생각한다]]></category>
		</item>
				<item>
			<title><![CDATA[I’ve been busy installing audio and TV home theater systems from my sister-in-law’s house.]]></title>
			<link><![CDATA[https://jamespage.org/?kboard_content_redirect=406]]></link>
			<description><![CDATA[지난 며칠동안 제수씨네 집에서 동생이 즐겨 쓰던 두개의 오디오와 TV home theater 시스템을 가져와 install하는데 바빴다. 동생이 2010년에 쓰던 amp, pre amp, cd player…들이기에 처음 문제는 연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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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시스템은 다 옛날 것이기에 문제가 없었지만 TV와 연결하려니 pre amp에 HDMI가 없고 HDMI arc나 digital audio out을 써야하는데 잘되지않아 Amazon 에서 물건을 샀다가 여러번 return을 하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try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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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동생이 살아있다면 절대 내게 주지않았겠지만 제수씨가 이사할 준비를 하고 물건들이 무겁고 아들이 쓰지않겠다고 해서 내게 주겠다고 한 것 같다. 여튼 유일하게 대화가 통했던 동생을 생각하면서 음악을 듣는다.
내게는 형이 하나있고 동생이 둘이 있다. 그러니까 4형제이다. 막내가 없으니 3형제이지만 전혀 서로 연락을 하지않는다. 가끔 두살위의 누나에게 소식을 묻고는 한다. 관계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서로 대화가 되지않으니 피한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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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자주 4형제를 가졌던 BeeGees의 맏형 Barry Gibb을 생각한다. 제일 막내였던 Anndy, Robin, Maurice. 그들은 어렸을때부터 음악을 같이 하면서 서로 없으면 않될 정도로 친했다. 눈빛만 보아도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고 서로 내것 네것이 없이 나누면서 살았기에 이제 Barry 혼자 남게되어 그의 형제들을 향한 그의 마음을 생각할 때 나도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는 한번만이라도 그들과 다시 노래를 불렀으면 좋겠다고 눈물로 얼굴을 적시면서 말을 한다.

https://youtu.be/C5t-5ygKO9w?si=ZQXFhXh2p_ohPR_8
한 가족으로 자란 형제들이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내게는 없기에 그들의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내가 마치 그들중에 하나인 것 같은 착각을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렸을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고 형제 자매가 같이 자라면서 정으로 서로 없으면 않될 존재로 서로의 마음을 채우게 되는 것 같다. 장성해서 결혼하고는 가정을 이루면서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기에 살면서 항상 마음을 채우는 사람의 존재가 필요한 것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나의 모습을 찾게 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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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나의 마음을 비우는 것이 쉽지가 않다. 하나님앞에 사람들을 외면하고 혼자 선다는 것은 더욱이 이해가 되지않는 일이다. 하지만 어렸을때부터 가족을 가졌지만 서로 나누는 사랑이 없이 자랐고 육체의 고통속에서 자신을 보면서 자란 사람에게는 하나님앞에 혼자 서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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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 OBC의 Pastor David는 “When Isaac Met Rebekah: A Marriage Story for the Ages (Genesis 24)”라는 제목으로 아브라함의 하인이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 마침내 리브가를 만나는 장면의 설교를 했다. 난 Pastor David가 지난 주말에 설교제목과 함께 창세기 24장을 읽으라고 해서 읽고 지난 주일 아침 혹시설교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해 AI의 도움을 받고 e메일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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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 David는 설교에 내가 말한 것을 이미 안 것 같이 낙타가 한번에 얼마나 마시는지 얘기를 했기에 즉시 그가 답장을 보내지않았지만 난 그것으로 만족했다. 앞으로도 계속 설교에 어쩌면 도움이 될 지 모르는 나의 의견을 보내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내 경험으로는 미국교회 목사들은 반드시 답장을 하는데 한인 큰교회목사들은 e메일을 보내면 답장을 하지않았다. 중앙장로교회의 류응렬목사나 열린문교회의 목사가 그랬다. 아마 주식회사의 CEO같은 위치이니 평신도의 e메일은 답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은 우습게 자기들은 답하지않지만 예수님은 반드시 기도에 응답을 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보여준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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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가 끝나고 로비에서 Pastor. David가 나를 알아보고 서로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내가 그에게 e메일을 보냈었다고 아내에게 말하니 답장이 왔냐고 물었다. 난 목사가 주일에 바쁘고 한 교인의 e메일에 답장을 아무렇게나 할 수없으니 내일이나 보낼 거라고 말했지만 확신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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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에 예상했던대로 e메일 답장을 받았다. 앞으로 5월달에 4번에 걸쳐 있는 class에 join하고 Jeff와 Susan이 인도하는 쎌그룹에 들어가자고 아내에게 말했다. 난 Jeff가 집사인지 장로인지 모른다. 아내는 장로같다고 말을 하지만 말이다. 내가 그들에게 한인교회에서는 교인들 거의 다 이름뒤에 decon이니 elder로 부른다면 놀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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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는 OBC교인들이 Richmond에 가서 Abortion을 반대하는 march를 한다. Abortion을 하다가 실수로 살아서 세상에 나온 아기도 죽게 내버려두자는 민주당원들은 싫어하겠지만 인간을 창조하고 생명을 준 God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닮아 행동으로 표현하는 교인들이 귀하게 생각된다.🧡]]></description>
			<author><![CDATA[James Park]]></author>
			<pubDate>Wed, 22 Apr 2026 12:07:0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jamespage.org/?kboard_redirect=1"><![CDATA[오늘의 단상]]></category>
		</item>
				<item>
			<title><![CDATA[The Worst Poison in Your Kitchen Destroying Your Kidneys]]></title>
			<link><![CDATA[https://jamespage.org/?kboard_content_redirect=404]]></link>
			<description><![CDATA[https://youtu.be/WFDruHtSxns?si=CvJ5w4Dg7-ucQ8aP]]></description>
			<author><![CDATA[James Park]]></author>
			<pubDate>Tue, 21 Apr 2026 14:08:0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jamespage.org/?kboard_redirect=9"><![CDATA[FREE BOARD]]></category>
		</item>
				<item>
			<title><![CDATA[The Seven Gates Leading to Hell]]></title>
			<link><![CDATA[https://jamespage.org/?kboard_content_redirect=403]]></link>
			<description><![CDATA[지옥으로 이끄는 7개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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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이 조각해 만든 지옥의 문 ”이 문으로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살인이 있기 전, 간음이 있기 전, 반역이 있기 전, 교만이 있었습니다. 루시퍼는 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사였지만, 교만이 속삭였습니다. "너는 숭배 이상의 것을 받을 자격이 있어." 너는 숭배받아야 마땅해. 그 순간, 루시퍼는 타락했습니다. 천국에서 쫓겨나 사탄이 되었습니다. 모두 단 하나, 교만 때문입니다. 당신은 교만이 어렵다고 생각하겠지만, 교만은 모든 죄악의 근원입니다. 교만은 "나는 도움이 필요 없어. 나는 교정이 필요 없어. 나는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해야 할지 말씀해 주실 필요가 없어."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strong>교만은 지옥으로 가는 첫 번째 문입니다.</strong> 잠언 6장 1절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합니다. 교만은 멸망에 앞서고,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에 앞선다. 지옥은 단지 악한 사람들로만 가득 찬 곳이 아닙니다.
이곳은 교만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진실을 듣고도 눈을 굴리는 사람들, 경고를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 말입니다. 교만은 항상 시끄럽고 오만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조용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나중에 해결하겠다는 목소리, "내가 성경보다 더 잘 안다"는 목소리, "하나님은 내 마음을 아신다"는 변명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무서운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교만은 회개하지 못하게 막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 가든 기도하든, 사람들이 당신을 영적이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습니다. 교만이 당신의 삶을 이끌고 있다면,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왕좌를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중에는 죄책감을 느끼거나 영적인 이끌림을 느낀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문제가 생겼지만 교만은 "고백하지 마라"고, "사과하지 마라"고, "약해 보일 것이다"고 속삭입니다. 교만은 당신의 이미지를 지키려 하지만, 사실은 영혼을 파괴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 말씀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순종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기다린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 메시아를 죽였습니다. 교만이 그들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교만은 그들을 굳게 만들었습니다. 교만은 그들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열고 "저를 살피시고, 부수시고, 인도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 것이 언제였습니까? 16살 때나 감정이 북받쳐 오르던 그 예배 시간에 한 번이 아니라, 바로 오늘 말입니다. 교만은 잠깐 들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교만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는다면, 지옥으로 가는 첫 번째 문은 활짝 열려 있을 것입니다.

지옥에는 경고 라벨이 붙어 있지 않습니다. 속삭임과 함께 찾아옵니다. "그렇게 나쁘지 않아. 하나님은 이해해 주실 거야. 딱 한 번만." 타협이란 그런 겁니다. 누구도 어느 날 갑자기 "내 영혼을 파괴해야겠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타협은 확신에서 당신을 멀어지게 합니다. 그리고 어느새 당신은 예전에는 죄책감을 느끼게 했던 것들에 안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신 말입니다.

<strong>지옥으로 가는 두 번째 문은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strong> 오히려 미묘하죠. 마치 작은 죄악처럼, 사소한 변명처럼 보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는 건 알지만… 저는 다른 사람들만큼 나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제 마음을 아십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거룩함보다 편안함을 선택할 때도 아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16절은 당신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네가 미지근하여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으니 내가 너를 내 입에서 토해내겠다." 하나님은 어중간한 순종에 속지 않으십니다. 겉치레뿐인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이나 타협적인 삶에 감명받지도 않으십니다. 마귀는 당신이 사탄 숭배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당신이 미지근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열정을 멈추고, 기도를 멈추고, 회개를 멈추십시오.

삼손은 처음부터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들릴라가 그에게 청혼했고, 그는 타협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힘을 잃어갔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너졌습니다. 바로 그것이 위험입니다. 당신은 열정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이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그냥 영화일 뿐이야. 농담일 뿐이야. 세상 문화가 그런 거야."라고 말하죠. 하지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에 영적으로 의존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사라져도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 중 일부는 죄와 싸우거나 슬퍼하는 대신, 죄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저 관리하는 거죠. 당신은 죄책감을...암시일 뿐입니다.

사탄은 당신이 죄라고 부를 때 미소 짓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타협은 결코 작은 것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타협은 커지고, 퍼지고, 굳어집니다. 하나의 타협은 또 다른 타협의 문을 열어줍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당신의 삶은 당신이 주장하는 믿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공허함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척하는 데 더 능숙해지죠. 평범함이면 충분하다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지 마세요. 예수님은 당신이 평범하게 살아가도록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특별해지도록 죽으셨습니다. 자, 질문입니다. 당신은 어떤 죄를 사소하게 여겨왔습니까? 하나님께서 무너뜨리고 싶어 하시는 죄를 당신은 무엇을 용납해 왔습니까? 만약 당신이 그 문을 닫지 않는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strong>세 번째 문은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strong> 당신은 상처받았고, 배신당했고, 거짓말에 속았고, 버림받았고, 학대받았습니다. 이해합니다. 인생은 깊은 상처를 남기죠. 하지만 냉혹한 진실은 이렇습니다. 마음에 지옥을 품고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지옥이 가장 좋아하는 씨앗입니다. 상처로 시작해서 점점 더 깊어지죠.

벽은 벽입니다. 그리고 그 벽이 커지도록 내버려 두면, 그것은 무기가 됩니다. 마귀가 당신을 공격하는 데 사용하는 무기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15절에서 더듬거리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아무리 많은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아무리 많은 찬송가를 부르고,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준다 해도, 용서하기를 거부한다면 소용없습니다.

당신은 파멸로 향하는 문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용서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당신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어떻게 용서를 거부할 수 있습니까?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상대방에게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 자신을 독으로 물들이고, 당신의 기도를 흐리게 합니다.

원한은 기쁨을 가로막고 마음을 굳게 만듭니다. 원한을 품는 것이 자신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쓰라린 마음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쓰라린 마음은 악마가 번성하기에 좋은 토양입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마음을 닫고 있으면 지옥에 자리를 내주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단순히 화가 난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감염되었습니다. 용서하기 전까지는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용서는 그들이 한 일이 괜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용서는 "하나님, 저는 당신께서 이 일을 심판하시리라 믿습니다. 모든 것을 당신께 맡깁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10년 전에 누군가에게 당한 일 때문에 갇혀 있습니다. 하지만 열쇠는 그들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고통에 갇혀 있습니다.

당신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세요. 놓아주세요. 예수님은 당신의 죄를 십자가에 짊어지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무덤까지 가져가지 마세요. 힘들다는 거 알아요. 불공평하게 느껴진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지옥은 상처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천국은 상처를 놓아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요. 무엇이 더 중요한지 결정해야 해요. 자존심인가, 아니면 평화인가? 아니면 고통인가?

당신의 목적. 분노할 권리. 또는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구.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강력하게 느껴지지만, 결국 족쇄로 이어집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당신이 용서하지 않는 그 사람이 당신을 세 번째 문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 지금 당장 그 문을 닫으세요. 쓰라린 마음이 당신의 무덤이 되기 전에.

<strong>4번째 문은 성적인 죄의 노예들.</strong> 아무도 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모두가 지나다니는 문, 바로 그 문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성적인 죄. 음욕. 음란물. 간음. 간음. 동성애. 세상은 이런 것들을 찬양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심판하십니다. 우리 세대는 온갖 더러움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유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고린도전서 6장 18절: "음행을 피하십시오. 다른 모든 죄는 몸 밖에 있습니다." 그러나 음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자기 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음행은 단순한 실수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향한 전쟁입니다. 솔직히 말해봅시다. 처음에는 사소하게 시작됩니다. 잠깐의 눈길, 클릭 한 번, 시시덕거리는 메시지 하나. 하지만 곧 그것은 당신을 집어삼킵니다.

당신은 죄책감 없이 예배할 수 없습니다. 부끄러움 없이 기도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불순함에 묶여 있으면 순결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당신에게 말해주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성적인 죄는 침실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운명을 오염시키고, 당신의 평화를 앗아가고, 당신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당신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이사야 59장 2절.

"당신의 죄가 당신과 하나님을 멀어지게 했습니다. 왜 하나님과 멀어진 느낌이 드는지 궁금하겠죠.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지 않으신 자와 동침하고 있고, 하나님이 당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죽으신 것을 여전히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제 현실을 직시합시다. 성적인 죄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이끕니다. 하나님이 성을 미워하셔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을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언약에서 성을 빼내어 타락시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을 숭배합니다. 쾌락을 쫓고, 하룻밤 관계를 갈망하며, 매력을 우상화합니다. 그러고는 왜 영혼이 상처받는지 의아해합니다. 진실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하룻밤 관계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끝없이 스크롤하며 음란한 생각에 사로잡히고, 검색 기록을 지우고 다시 시작하도록 창조된 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순결을 위해, 온전함을 위해, 언약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8절에서 “여자를 음욕으로 바라보는 자는 이미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행동에 관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만약 당신의 마음이 음욕에 사로잡혀 있다면, 당신은 단순히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그 욕망에 굴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까지 깨뜨리십니다. 당신은 더 이상 음욕에 중독되어 살 필요가 없습니다.

수치심에 숨어 지낼 필요도 없고, 갇혀 지낼 필요도 없습니다. 회개할 수 있고, 씻겨질 수 있고, 자유롭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은 쾅 닫아버려야 합니다. 앱을 삭제하고, 번호를 차단하고, 불륜 관계를 끊고, 비밀을 고백하고, 모든 다리를 불태워 버리세요. 성적인 죄는 불과 같습니다. 그 불장난을 계속한다면, 당신의 영혼은 완전히 타버릴 것입니다.

<strong>5번째 문은 관계 없는 종교. 이것이 가장 위험한 문일지도 모릅니다.</strong> 겉보기에는 기독교 같고, 믿음처럼 느껴지고, 하나님처럼 들리지만, 공허합니다. 관계가 없는 종교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22-23절에서 이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내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유익을 얻지 못했습니까?' 할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라." 그러면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한다. 악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해하셨습니까? 그들은 모든 옳은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종교가 있었지만, 그분과의 친밀함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무서운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수도 있고, 책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도 영적으로 죽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면서도 찬양하는 대상이 누구인지조차 모를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는 형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함께하는 임재입니다. 의식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종교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형식적인 체크리스트에 만족해야 할까요?

교회에 가세요. 성경 구절을 적어 두세요. 그리고 남은 한 주를 하나님을 그저 개념으로만 여기고, 왕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내세요.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그건 죽은 종교입니다. 죽은 종교는 당신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당신을 속일 뿐입니다. 당신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느끼게 할 뿐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 이사야 29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백성은 자기들의 것으로 나를 공경한다."

입술은 그럴듯하지만 마음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네. 낯익은 말인가요? 당신은 옳은 말을 하지만, 마지막으로 그분 앞에서 눈물을 흘린 게 언제였나요? 마지막으로 그분의 음성을 들은 게 언제였나요? 마지막으로 순종한 게 언제였나요?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해서 말이죠. 종교는 더 많이 하라고, 더 열심히 노력하라고, 하나님께 감명을 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관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더 가까이 오세요. 더 깊이 항복하세요. 저를 믿으세요." 그리고 진실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 출석 횟수에 감명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관심과 애정을 원하십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원하십니다. 단지 일요일에만 매일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말입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규칙이 아니라, 더 많은 예수님입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그분의 임재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미 그분께 나아간 것입니다.

5번 문을 통과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닫을까요? 현실을 직시하세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세요. 솔직해지세요. 신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더 이상 종교는 필요 없어요. 당신만 원해요." 그 한 마디 기도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strong>6번째 문은 이 세상을 향한 사랑</strong>. 바로 옆 문은 너무 흔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험하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살인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마술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심지어 명백한 반역에 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 이해하셨나요? 이해 못 하실 겁니다.

“세상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이 세상에는 하나의 시스템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당신의 애정을 천국에서 멀어지게 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하나씩 차례대로 유혹을 뿌리치게 하는 것입니다. 명성, 돈, 영향력, 쾌락.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꿈을 쫓는 것. 인스타그램에서는 멋져 보이지만 영원에서는 파산할 삶을 만들어가는 것. 그러면서도 스스로에게 그것이 단지 성공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저 야망을 품고, 최고의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것. 하지만 서서히 마음이 흔들립니다. 예전처럼 기도하지 않게 되고, 말씀을 갈망하지 않게 되고, 예배 중에 눈물 흘리지 않게 됩니다. 세상이 더 좋고, 더 안전하고, 더 화려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이렇습니다.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 당신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상에게 절하면서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은 우상입니다. 자신의 모습도 우상이 될 수 있고, 통장 잔고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안락함, 영향력, 직업,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이 섬기는 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모두 섬기십시오.” 그리고 이것은 단지 돈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의 가치관 전체에 관한 문제입니다. 세상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영원을 위해 살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기분 좋은 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스스로 신이 되어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당신은 진정으로 어떤 왕국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만약 당신이 믿는 기독교 신앙이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이 아닐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4절은 마치 주먹으로 배를 맞는 듯한 충격을 줍니다.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기를 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원수입니다. 신앙심이 부족하거나 미성숙한 것이 아닙니다. 원수입니다. 그런 사람은 날아오를 수 없습니다.

세상과 함께하면서도 왕께 충실해야 합니다.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네, 어쩌면 친구를 잃을 수도 있고, 꿈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고, 한때 당신을 살아있게 했던 것들을 쫓는 것을 멈춰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임재, 그분의 평화, 그분의 목적 말입니다. 그러니 경고합니다. 만약 당신이 이 세상에 너무 안주하고 있다면...
당신은 다음 단계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영혼을 잃기 전에 이 문을 닫으십시오.

<strong>7번째의 문은 진리의 거부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문입니다.</strong> 그리고 이 문이 당신의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실수는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죄는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실패 후에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거부한다면, 당신은 유일한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기를 거부하므로 멸망하며,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지옥은 단지 악한 사람들로 가득 찬 곳이 아닙니다.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곳입니다. 그들이 진리를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거슬리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당신의 죄를 직면하게 합니다. 진리는 당신의 감정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절대 굴복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그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진리는 철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의견도 아닙니다. 진리는 당신의 진리도 아니고, 나의 진리도 아닙니다. 진리는 인격체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진리를 거부할 때, 당신은 단순히 어떤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이 문은 치명적입니다. 겉으로는 깨달음을 얻은 듯 보이고, "진보적", "포용적", "사랑"과 같은 단어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달콤한 말로 포장된 반역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당신은 성경을 당신의 생활 방식에 맞춰 왜곡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확신을 침묵시킬 수 없습니다. 단지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요. 그런데 우리 문화는 바로 그렇게 합니다. 거룩함을 설교하는 목사들을 배척하고, 순결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조롱하며, 자신의 욕망보다 성경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대중의 의견이 바뀐다고 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모든 거짓이 드러나고, 모든 가짜 복음이 산산이 조각날 것입니다. 단 하나도 남김없이 말입니다.

반역적인 마음은 자신들이 거부했던 분이 영광 가운데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마음을 바꾸기엔 너무 늦을 것입니다.

당신이 진리를 바꾸고 있습니까? 아니면 진리가 당신을 바꾸고 있습니까? 속임수와 손을 잡고 천국에서 깨어나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회개하십시오. 돌아오십시오. 방향을 바꾸십시오. 말씀이 당신을 일깨우도록 하십시오. 그래야 치유될 수 있습니다. 확신을 가지십시오.

당신을 부수십시오. 그래야 은혜가 당신을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진리를 거부하는 것은 당신을 자유롭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길을 잃게 할 뿐입니다. 하지만 진리는 당신이 받아들인다면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문을 닫으십시오. 반대편에서 잠기기 전에. 결론: 일곱 개의 문. 하지만 여전히 출구는 하나입니다. 이제 당신은 그 일곱 개의 문을 모두 보았습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당신은 끔찍한 사실을 깨달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하나, 둘, 아니면 일곱 개 모두를 지나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당신이 아직 숨을 쉬고 있다면, 너무 멀리 간 것은 아닙니다. 확신을 느낄 수 있다면,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지옥으로 향하는 일곱 개의 문이 있을지라도, 생명으로 향하는 문은 하나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0장 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로 들어가든지 구원을 받으리라." 종교도 아니고, 선행도 아니고, 긍정적인 기운도 아닙니다. 예수님,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을 쫓아오고 계십니다. 모든 설교를 통해, 모든 경고를 통해, 모든 순간을 통해 말입니다.

잠시 침묵하십시오. 당신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말입니다. 당신은 그분을 느꼈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분이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에게는 영원이 없습니다. 당신은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고, 나중에 진지하게 생각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당신은 언제 마지막 숨을 쉬게 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영원으로 건너가면, 그 문은 양쪽으로 열리지 않습니다.

지옥은 실재합니다. 천국도 실재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매일 그 어느 곳으로든 향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감정이나 과거, 혹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누구를 따르고, 누구에게 순종하고, 누구를 사랑하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묻겠습니다. 당신은 세상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당신은 그저 장난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죄와 장난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회개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그저 형식적으로만 행동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과 함께 걷고 있습니까? 가장 큰 비극은 잘못된 문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올바른 문 앞에 서서도 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들어가겠습니다." 그게 초대였어요. 하지만 그는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description>
			<author><![CDATA[James Park]]></author>
			<pubDate>Tue, 21 Apr 2026 12:47:5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jamespage.org/?kboard_redirect=7"><![CDATA[자료실]]></category>
		</item>
				<item>
			<title><![CDATA[I have finally found a home church where I can pour out my heart.]]></title>
			<link><![CDATA[https://jamespage.org/?kboard_content_redirect=401]]></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jamespage.org/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1/202604/69e4b32bde3361374419.jpeg" alt="" />

집앞의 작은 정원에 아이리스꽃이 피고 있다. ‘아이리스’는 한국의 드라마의 이름을 접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꽃이 아름다워 Clifton에 살때부터 집주위에 뿌리를 심었었다.
우리집 아이리스는 겨울이 한창일때 땅위에 올라와 자라나서 추위에 몸을 움추리듯 견디었고 봄이 되고 날씨가 따뜻해지자 성숙해 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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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보라색 아이리스는 왕족과 지혜를, 파란색은 희망과 믿음을, 노란색은 열정을, 흰색은 순수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금년에 아이리스는 나에게 새로운 소망이 현실화됨을 의미한다고 믿게 되는 꽃이다.

오늘은 주일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날이다.
Pastor David는 어김없이 며칠전 오늘 있을 설교의 간략한 내용과 함께 성경을 미리 읽어오라고 메일을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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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내어 창세기 24장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분량이 꽤 긴 장이지만, 이 본문에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그만큼 더 큰 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에 예배하러 나아갈 때, 주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준비된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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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주일 예배 David 목사의 설교 제목은 ‘Art of the deal’이었다.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라가 뭍힌 무덤 장소는 가나안 땅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Cave of the Patriarchs)로 현재 팔레스타인 웨스트뱅크(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헤브론 시내에 위치하는데 아브라함이 헷 족속의 에브론에게 은 400세겔을 주고 밭과 함께 매장지로 구입한 deal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 무덤장소는 사라를 시작으로 아브라함, 이삭, 리브가, 야곱, 레아가 묻힌 족장들의 가족 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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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of the deal’은 President Trump가 쓴 책이름이어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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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우리는 모든 인간의 생명이 거룩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것임을 믿습니다(창 1:27). 인간의 생명은 태어나지 않은 아기, 노인,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가진 이들, 그리고 잉태의 순간부터 자연스러운 죽음에 이르는 모든 단계와 상황을 포함하여, 그 모든 차원에서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인간의 생명을 옹호하고, 보호하며, 소중히 여길 사명을 받았습니다(시 139편).</strong>

다음 주 수요일에는 OBC 교인들이 Richmond에서 열리는 '버지니아 생명 대행진(Virginia March for Life)'에 참여한다는 메일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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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오랫동안 내가 Home church로 부를 수 있는 교회를 찾았었다. 교회의 움직임이 성경적이고 교인들이 감정적이기 보다는 지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며 컴패션 사랑이 있고 사회정의에 나몰라라하지 않는 교회를 말이다. 교회가 클필요는 없다. 내게 작은 교회가 좋다.
최근에 찾은 교회가 Cornerstone Chapel이었는데 거리가 멀어 두번 인가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on line으로 예배를 드리는데 드디어 Home church를 집에서 3.5마일 떨어진 곳에서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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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아내가 5월 중순에 일을 그만두게 되는데 이제 몸과 마음을 다해 섬길 교회를 알게 해준 것이다.
아내에게 돈이 가는 곳에 마음이 간다고 헌금도 할 수 있는대로 아끼지않고 하고 앞으로 핸디맨으로 교인들을 돕고 수고비를 받으면 교회에 헌금하자고 말했다.
이제 나의 친구들은 한국인 몇명과 함께 Jeff와 Seth등 미국인들이 될 것이다.
https://youtu.be/91Amvj0Xs3Y?si=WTVkFrQAtxhnKfHK
어제는 Leesylvania Park에 갔었다. 날씨가 따뜻하지만 바람이 좀 세게 불은 날이었기에 보트를 물에 띄우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아들과 며느리는 ‘엄마날’에 같이 강에 나가 보트타자고 말하는데 날씨가 괜찮을지 모르겠다.
이번주중에 캠핑을 예약했는데 야외에서 지내면서 또 사람들과 교제 할 생각을 한다.]]></description>
			<author><![CDATA[James Park]]></author>
			<pubDate>Sun, 19 Apr 2026 10:52:5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jamespage.org/?kboard_redirect=1"><![CDATA[오늘의 단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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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Microsoft is dead]]></title>
			<link><![CDATA[https://jamespage.org/?kboard_content_redirect=400]]></link>
			<description><![CDATA[https://youtu.be/jryMHa-Vf-g?si=zn6so6v7CJJJ79nV]]></description>
			<author><![CDATA[James Park]]></author>
			<pubDate>Sat, 18 Apr 2026 00:58:4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jamespage.org/?kboard_redirect=9"><![CDATA[FREE BOARD]]></category>
		</item>
				<item>
			<title><![CDATA[“7 Things You Shouldn't Do, If You Want to Go to Heaven”(2)]]></title>
			<link><![CDATA[https://jamespage.org/?kboard_content_redirect=399]]></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jamespage.org/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2/202604/69e143f2148564880046.jpeg" alt="" />

어제 제수씨네집에 가서 동생이 즐겨 쓰던 오디오 시스템 두개를 집에 옮겨 한개를 setup을 하고는 오늘 아들집에 가서 낙엽청소를 도와주고 돌아와 모짜르트의 음악을 듣는다. 섬세하게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소리가 나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것 같다.
며칠전에 “7 Things You Shouldn't Do, If You Want to Go to Heaven”의 세번째까지 올렸는데 나머지 4-7 things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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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네번째, 마음에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품고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strong> 아무리 옳았든, 상처가 깊든, 상대방이 당신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었든 상관없습니다. 용서하기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막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14절과 15절에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용서에 있어서 장난치지 않으시며, 원한을 품고 있으면서 은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정의를 요구하면서 하나님께 자비를 구할 수는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마음을 독으로 물들일 뿐만 아니라 천국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하지만 그들이 제게 무슨 짓을 했는지 당신은 모르잖아요.”라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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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못 박히는 순간에도 <strong>“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strong>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그들의 행동이 괜찮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리라 믿는다는 뜻입니다. 잊어버린다는 뜻도 아닙니다. 용서는 그 죄가 당신의 영원한 삶을 얽매지 못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지옥은 옳았지만 용서하지 않은 사람들로 가득 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단 한 번만 용서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70번씩 일곱 번씩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매번 용서하고 놓아주십시오. 용서하는 자가 자유롭게 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복수심을 품는 것이 힘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속박이고 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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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품고 있는 그 원한은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사과를 받지 못하거나 “내가 잘못했어”라는 말을 듣지 못할 수도 있고, 마음의 정리를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용서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당신에게 한 어떤 행위도 당신의 죄가 예수님께 끼친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 당장 용서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하고, 원한을 내려놓으세요. 놓아주세요. 쓰라린 마음으로 가득 찬 삶이 당신의 영원한 영광을 앗아가게 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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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다섯번째, 구원받은 척하지 마십시오. 거듭나십시오.</strong>

많은 교회가 간과하는 무서운 진실이 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더라도 여전히 길을 잃은 상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 참석, 기도, 세례, 봉사 등 종교적 행위를 한다고 해서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strong>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 살펴보라”</strong>고 말씀하신 것처럼 스스로를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지옥은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로 가득 찰 것입니다. 예수님 곁에 있다고 해서 그분께 속한 것은 아닙니다. 유다는 그리스도와 함께 걸었지만 지옥에 갔습니다. 감정적인 순간, 예배 중 손 드는 것, 성경 구절을 아는 것 등은 구원의 증거가 아닙니다. 진정한 증거는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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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죄를 미워하십니까, 아니면 숨기십니까?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아니면 지옥을 두려워하십니까? 순종하며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반역을 정당화하십니까? 거듭남은 영적인 쾌락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죽음입니다. 자아를 부인하고, 자신의 뜻을 내어드리며, 죄에서 돌아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지거나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는 가입했지만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하나 된 것은 아닙니다. 종교는 받아들였지만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묻겠습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아니면 단지 교회 문화에 익숙한 것입니까? 만약 죄책감 없이 죄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면,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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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닙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건 회심입니다. 성령님은 죄를 더 안전하게 느끼게 해 주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견딜 수 없게 만드십니다. 지금이 바로 당신의 각성입니다. 더 이상 거짓으로 살지 마십시오. 더 이상 확신하지 마십시오. 구원받았다고 바라지만 말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저는 교회 가면을 원하지 않습니다. 새 마음을 원합니다. 종교는 필요 없습니다."

나는 부활을 원합니다. 진정으로 거듭나기에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늦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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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6번째, 침묵하지 마십시오. 숨겨진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strong> 담대하게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당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알아챈 적이 마지막으로 언제였습니까?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어서도 아니고, 자기소개에 "축복받은"이라고 써 있어서도 아니고, 성경 구절을 한 번 게시해서도 아닙니다. 당신의 삶이 예수님의 사랑과 열정과 진리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죄악을 외치는 세상에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반역을 외치는 세대에서 믿음을 속삭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 26절에서<strong>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strong>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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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인자가 그의 영광 중에 올 때에 그들을 부끄러워할 것이다."</strong> 이 구절 하나만으로도 당신의 목소리가 절박함으로 떨려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세주를 몰래 따를 수는 없습니다. 숨어서 십자가를 질 수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 배척당할까 두려워 천국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초대 교회가 살아남은 것은 그들이 세상에 섞여 들어갔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담대했고, 목소리를 높였으며, 어둠에 맞서는 위험한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들이 귀찮아서가 아니라,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직장을 잃을지라도, 친구를 잃을지라도, 심지어 목숨을 잃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색해질까 두려워 침묵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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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침묵은 중립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의입니다. 세상에 어울리기 위해 예수님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다. 굴복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보호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침묵하기 위해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빛을 발하기 위해 구원받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은<strong>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의 도시는 숨길 수 없느니라"</strong>라고 말씀합니다. 불을 피워 침대 밑에 숨겨두지 않듯이, 영생을 얻고 나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척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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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확신을 필요로 합니다. 담대함을 필요로 합니다. 교회가 침묵한다면 어둠이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니 말하십시오. 당신의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큰 소리로 기도하십시오. 입으로 복음을 전하십시오. 분위기만이 아니라. 지옥은 조용한 그리스도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믿는 자가 입을 열어 사랑으로, 두려움 없이 진리를 말할 때 지옥은 떨게 됩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세상은 당신의 믿음을 알고 있습니까? 혹시 당신은 위장 잠입 중이신가요? 숨겨진 신앙은 죽은 신앙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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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7번째, 아직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일은 보장되지 않습니다.</strong> 원수가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큰 거짓말 중 하나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탄은 항상 예수님을 거부하도록 유혹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분을 따르는 것을 미루도록 설득할 뿐입니다. "나중에 진지하게 생각할 거야." "다음 주에 회개할 거야." "삶이 좀 여유로워지면 하나님을 따를 거야." 야고보서 4장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삶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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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당신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당신에게는 또 다른 한 해가 보장된 것도 아니고, 또 다른 하루가 보장된 것도 아니고, 심지어 심장 박동조차 보장된 것이 아닙니다.</strong> 그리고 사탄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당신이 하나님께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당신이 "아직은 안 돼요"라고 말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무도 "나중에"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거짓말입니다. 사람들은 매일 내일을 계획하며 죽어갑니다.

사람들은 숨 쉬며 잠에서 깨어나 점심때까지 버티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다음번에 와서야 응답해야지 하고 생각하며 교회를 나섭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당신의 영적 어휘에서 가장 위험한 단어는 "나중에"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시간이 더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재물을 쌓아두고 "편히 쉬자.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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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은 네게서 요구될 것이다." 그는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묻겠습니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또 다른 교회 예배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또 다른 감동적인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또 다른 확증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만약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구원받았습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강도는 두 명이었습니다. 한 명은 조롱했고, 한 명은 회개했습니다. 오직 한 명만이 구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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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위험한 도박을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성령께서 당신을 감동시키신다면, 움직이십시오. 마음을 굳게 하지 마십시오. 그 음성을 침묵시키지 마십시오. 또 다른 쾌락을 위해, 혹은 몇 년 더 반항하기 위해 영혼을 걸고 도박을 하지 마십시오. 천국은 실재합니다. 지옥도 실재합니다. 그리고 죽음은 다가옵니다. 그리고 일단 죽으면, 그 결정은 확정됩니다. 다시 할 기회는 없습니다. 두 번째 기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애원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이 바로 당신의 순간입니다. 예수님을 선택하십시오. 나중이 아니라, 지금 당장.

<strong>결론: 천국은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좁은 문을 통해 들어갈 수는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히 해 두겠습니다. 천국은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일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strong>

천국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천국에 갈 자격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은 거저 주시는 선물이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13절과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strong>"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넓은 문과 넓은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니라."</strong> 많은 사람이 그 길로 들어가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은 좁아서 찾는 자가 적습니다. 이 말씀에 주목하셨습니까? 소수만이 천국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을 숨기셔서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천국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룩함 없는 천국을, 왕 없는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과의 영원한 삶을 원하지만, 지금 당장 하나님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천국은 그런 식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서 돌아서겠다는 결심, 삶을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결심,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는 결심을 통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description>
			<author><![CDATA[James Park]]></author>
			<pubDate>Thu, 16 Apr 2026 20:17:2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jamespage.org/?kboard_redirect=2"><![CDATA[한주간 배우며 생각한다]]></category>
		</item>
				<item>
			<title><![CDATA[How to switch from Windows to Linux]]></title>
			<link><![CDATA[https://jamespage.org/?kboard_content_redirect=398]]></link>
			<description><![CDATA[https://youtu.be/IkJICR8qAso?si=mvl1n-EK23W82B_0]]></description>
			<author><![CDATA[James Park]]></author>
			<pubDate>Wed, 15 Apr 2026 10:12:3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jamespage.org/?kboard_redirect=9"><![CDATA[FREE BOARD]]></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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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Why 2026 is the Year Windows Dies: The Linux "Leap" No One Expected]]></title>
			<link><![CDATA[https://jamespage.org/?kboard_content_redirect=397]]></link>
			<description><![CDATA[https://youtu.be/uGE2DKMgUCM?si=REAMI9AZtolZB99r]]></description>
			<author><![CDATA[James Park]]></author>
			<pubDate>Wed, 15 Apr 2026 10:10:2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jamespage.org/?kboard_redirect=9"><![CDATA[FREE BOARD]]></category>
		</item>
				<item>
			<title><![CDATA[8 WORST Chicken Chains To Avoid at All Costs (And 3 Clear Winners)]]></title>
			<link><![CDATA[https://jamespage.org/?kboard_content_redirect=396]]></link>
			<description><![CDATA[https://youtu.be/UKJ8twxTZ9A?si=nD072RJhEAytXMz9]]></description>
			<author><![CDATA[James Park]]></author>
			<pubDate>Tue, 14 Apr 2026 18:24:2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jamespage.org/?kboard_redirect=9"><![CDATA[FREE BOARD]]></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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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7 Things You Shouldn't Do, If You Want to Go to Heaven(1)]]></title>
			<link><![CDATA[https://jamespage.org/?kboard_content_redirect=395]]></link>
			<description><![CDATA[며칠이 지나니 콧물이 코를 바쁘게 하지않고 몸이 아픈 것도 많이 나져서 오늘이 지나면 괜찮을 것 같다. 내일은 계획대로 제수씨네집에 가서 전기에 관한 몇가지를 고쳐준 후 이삿짐쎈터에서 오는 4명이 오디오 시스템을 내가 사는 집으로 옮기기로 했기에 봐주어야한다. 동생이 살아있을때 직장에서 집에 돌아오면 음악속에 파뭍혀 지낼때 쓰던 물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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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스템은 TV에 연결하고 또 한 시스템은 Sunroom에 놓을 생각이다. 요새 쓰는 HDMI가 아니기에 맞는 connector를 사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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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는 감기로 교회에 가지 않고 Online으로 예배드렸는데 아내의 뒷 모습이 보였다. 8:15에는 Cornerstone Chapel, Fairfax Church의 설교도 on line으로 드리기에 주일 아침에 세교회의 예배를 드리는 셈이다. OBC에는 거의 백인들이 참석하고 흑인들도 있지만 동양인은 만나지 못했다.
한시간 운전하는 거리의 한인교회에 가지않고 3.5마일에 있는 교회에 다니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봉사할 지 모르지만 미국인들과 같이 삶을 나누는 것이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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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와서 Mark Kim Dental Lab에 다니면서 기술을 배울때 Mark Kim이 거래처 Dentist들에게 charge 하는 금액은 높았다. Northern Virginia Community College에 dental tech class도 있었다. 하지만 80년대에 한인들이 많이 이민오면서 dental lab을 많이 열고 값을 싸게 하면서 NVCC의 dental tech class가 없어졌고 미국인들의 Dental Lab owners 모임이 있어서 쎄미나도 열고는 했는데 한국인들이 참석을 하지않아 결국 문을 닫았다.
만약 한국인들이 미국인들의 모임에 참석해서 모임도 살리고 만드는 제품의 값이나 질도 높혔으면 좋았을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인들이 미국인교회에 참석해서 영어를 익히고 미국인들과 함께 교회를 섬기면 좋을 것이지만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다음 한인 3세대에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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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 한 독일여자가 집에 왔었다. 그녀에게 가정에서 독일어를 쓰는지 영어를 쓰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부모가 미국에 사니 당연히 영어를 쓰도록 가르쳤고 자기도 자녀에게 영어로 말한다고 했다. 그러니 독일 할아버지를 가진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고, 쿠바인인 루비오가 미국의 국무장관이고 인도인인 파텔이 FBI director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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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오늘도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앞에서 그와 교제하면서 살 것이다. 가장 가까운 아내와 아들도 나의 마음에서 떠나보내고 하나님에게 받은 소명을 중하게 여겨 약혼녀를 보낸 키에르케골과 부하게 자랐지만 사랑없이 세상에 바빴던 부모밑에서 외로이 참된 삶을 찾았던 쇼펜하우어를 벗으로 삼고 예수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취미생활과 별로 의미없는 여행이나 자기의 생각만 말하기 바쁜 사람들 만나 시간 낭비하는 것보다 혼자 마음을 비우고 새로 배우는 것들이 귀하고 가치있게 여겨진다.

어제는 <strong>“천국에 가고 싶다면 하지 말아야 할 7가지”</strong>영상을 보고 틀리지않다고 생각해 정리해 보았다. 글이 길어서 두번으로 나누어 올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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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첫째: 예수님을 무시하지 마십시오.</strong> 예수님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적 변명, 문화적 거짓, 영적 환상을 무너뜨리는 단 하나의 진리는 예수님 없이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 되거나, 친절이나 업보를 쌓거나, 종교나 의식을 행하거나, 심지어 신을 믿는다고 해서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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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strong>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수 없다.”</strong>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제안이나 비유가 아닌, 생명과 죽음,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분명한 경계선입니다. 영원의 기준은 좁지만, 마음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진리는 민주적인 것이 아니라 신성하며, 예수님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매주 교회에 나가고 봉사하며 십일조를 내고 성경 공부를 인도해도 구원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속하는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에는 예수님을 사실로만 알고 마음은 차갑고, 십자가를 장식처럼 여기는 위험한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팬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죄에서 돌이켜 순종하는 제자를 원하십니다. 유다처럼 예수님과 가까이 지냈지만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가장 위험합니다. 예수님은 삶에 장식처럼 덧붙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이시며, 모든 것을 그분 위에 세우지 않으면 무너질 것입니다. 천국을 원한다면 서구화되고 죄를 용인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주님이시며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참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천국은 거듭난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며, 그것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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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두번째, 회개하지 않는 죄 가운데 살지 마십시오</strong>. 은혜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가증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은혜를 믿고 영원한 삶을 걸고 있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반항을 위한 면죄부처럼 여깁니다. “죄송합니다”라고 가끔씩만 말하면 계속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만,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속임수입니다.

<strong>26 For if we go on sinning deliberately after receiving the knowledge of the truth, there no longer remains a sacrifice for sins,</strong>

히브리서 10장 26절은 <strong>“우리가 진리를 알고도 고의로 죄를 지으면 더 이상 죄를 위한 제사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strong>라고 말합니다. 진리를 알고도 계속 죄를 선택한다면 십자가는 그것을 덮어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약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마음이 은혜에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가증이 아니라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입니다.

우리는 천국과 죄 모두를 원하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순종의 십자가 없이 생명의 면류관을 원하고, 용서받았다는 느낌을 원하지만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장난을 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과 결혼했다고 해서 죄와 교제할 수 없고, 주일에는 손을 들고 예배드리면서 나머지 요일에는 악행을 저지르고 천국이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넘어지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그렇습니다. 죄에 안주하고, 죄를 정당화하고, 옹호하고, 숨기고, 심지어 즐기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사랑하는 것을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껴안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고, 떠나기를 거부하는 죄에서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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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죄를 용서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를 깨뜨리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당신은 어떤 죄를 변명해 왔습니까? 어떤 비밀과 화해했습니까? 어떤 타협을 그저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치부해 왔습니까? 당신이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당신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9절은 <strong>“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리라”</strong>고 말씀하지만, 이는 절대 실수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반항적인 삶에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죄책감 없이 죄를 지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완악해진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가지고 장난치지 말고, 영적인 말로 죄를 덮으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진심으로 회개하고, 눈물 흘리며 온전히 항복하십시오. 천국은 거룩하며, 거룩함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 필수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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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세 번째,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마십시오.</strong> 이 부분은 미묘하고 교활하며 치명적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17절에 분명하게 나와 있듯이, 세상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은 “<strong>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strong>”라고 경고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말씀보다 세상을 향한 마음을 더 크게 품고 살아갑니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명성, 돈, 섹스, 안락함, 박수갈채, 이미지, 권력 등 세상이 주는 것들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대신,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 대신 불타 없어질 것들 위에 삶을 세우는 것입니다.

매주 교회에 나가고, 예수님께 찬양을 드리고, 성경 구절을 게시한다고 해서 세상을 숭배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strong>“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strong>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롯의 아내는 하나님께서 버리라고 하신 죄악된 도시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소금 기둥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놓아주라고 하신 것을 아직도 뒤돌아보고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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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청년 관리는 영생을 갈망했지만, 돈에 대한 집착이 더 컸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을 떠나 자신의 재산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진정한 보물로 여기지 않고, 결국 천국을 얻지 못하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천국은 오직 예수님, 그분의 영광, 통치, 거룩함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거부하면서 그분의 보상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구원의 초대가 아니라, 세상을 떠나 구별되고 다르게 살라는 부르심입니다. 세상에 관심을 쏟으면 애정을 갖게 되고, 결국 충성을 바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오늘 밤 다시 오신다면, 신부를 맞이하실 분을 찾으실까요, 아니면 배교자를 만나실까요? 세상을 놓아주십시오. 세상은 당신의 영혼보다 가치가 없습니다.🧡]]></description>
			<author><![CDATA[James Park]]></author>
			<pubDate>Tue, 14 Apr 2026 10:11:0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jamespage.org/?kboard_redirect=2"><![CDATA[한주간 배우며 생각한다]]></category>
		</item>
				<item>
			<title><![CDATA[Fake Food Is KILLING China - And It Might KILL You Too]]></title>
			<link><![CDATA[https://jamespage.org/?kboard_content_redirect=394]]></link>
			<description><![CDATA[https://youtu.be/-9pkwLTvRrw?si=GPmCGnABRWfgTvNG]]></description>
			<author><![CDATA[James Park]]></author>
			<pubDate>Tue, 14 Apr 2026 01:27:2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jamespage.org/?kboard_redirect=9"><![CDATA[FREE BOARD]]></category>
		</item>
				<item>
			<title><![CDATA[I caught a cold for the first time in a long while.]]></title>
			<link><![CDATA[https://jamespage.org/?kboard_content_redirect=393]]></link>
			<description><![CDATA[오랜만에 감기에 걸렸다. 코가 막히고 기침을 하니 몸이 흔들린다. 이제 며칠간 더 고생을 해야할 거로 기대하지만 바쁜 God에게 나의 감기를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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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교회에서 남자들 ‘아침식사와 교제’가 있다고 오라고 했지만 감기로 가지 못한다고 메세지를 보냈다.
오래전에 미국의 공문 문서에는 race에 흑인과 백인밖에는 없었다고 한다. 해서 Asian들은 흑인이 아니기에 백인으로 인정이 되었다고 하는데 얼마전 다니던 흑인이 많은 MOVE church와 지금 다니는 OBC를 비교하면 백인들이 더가깝게 나나 아내에게 접근하는 것을 체험한다. 지난 주일에는 처음 교회에 방문할때 안내해 주었던 Jeff의 아내가 다가와서 인사하고 자기들이 속한 쎌그룹을 소개해 주었고 아내는 전화번호를 서로 나누었다. Move교회에서는 아무도 전화번호를 나눈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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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C의 Pastor of Preaching &amp; Theology는 David로 신학박사여서 그런지 설교가 대학교에서 강의를 듣는 것 같아 배운다. 그리고 메일로 공부할 거리를 알려준다.
한인사회와 한인교회에 다니지않으며 같은 언어를 쓰는 그룹안에 있지않으니 조금 섭섭한 것이 있는 것 같다. 해서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만난 친구들을 찾고는 했는데 이제 그만 두어야할 것 같다. 서로의 관계속에 암만해도 서먹서먹한 감이 지워지지않고 내가 그들의 집안에 무엇을 고쳐준다고 해도 별로 보람이 없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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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말대로 서너 친구만 서로 교제하면 그것으로 족하고 난 OBC에서 사람들을 사귀면 될 것 같다. 한국인 흑인 백인을 놓고 무엇을 해주면 가장 감사를 많이 표하는 인종이 백인인 것을 체험했다. 오래전 MBC다닐때 쎌그룹의 리더부부와 강에 가서 보트를 같이 탄 적이 있었다. 그들은 메세지로 전화로 그리고 점심을 사주면서 고마움을 표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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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수씨집에 쓰지않는 소파와 TV를 한 흑인에게 연락해서 가져가도록 했는데 그 흑인에게 준 것이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간단히 고맙다는 말이상 준것에 비해 받은 것은 없다. 하지만 쓰지않는 물건을 치워주는 것으로 내가 감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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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한국에 대해 이곳에 사는 한국인들에 대해 별로 pride를 가지지 못한다. 아니 부정적인 면이 더 많다. 아들과 며느리도 마찬가지이다.
아들은 고등학교졸업하고 대학에 진학을 바로 하지 못했다. 공부를 하지않았기 때문이었다. 난 아들에게 공부 잘하라고 말한적이 없다. 내가 신일학교에 다닐때 매일 시험을 치면서 공부하게 했던 것이 싫었기에 무엇이든 하다 못해 grocery store에서 cashier를 하더라도 열심히 하면 된다고 아들에게 말했던 것 같다. 뒤에 아들은 내게 왜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않았냐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아들은 Community College에 들어가 졸업하고 일반 대학교로 편입을 했는데 그때 사귀던 한인친구들과 그들의 부모들에게서 자존심 상하는 소리들을 들었던 것 같다. 아들은 고등학교때 사귀던 친구들을 다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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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는 Va Tech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Coporate CPA로 일하는데 가는 곳마다 한국인들과 부딪치고 있다. 지금은 자기 밑에서 일하는 X이 상사에게 자기를 험담하고 고의적으로 자기의 일을 때로 지우고는 해서 다른 곳으로 옮길까 생각한다고 한다. 한국사람을 좋아할리가 없다. 자기 남편과 시아버지인 나를 빼고 말이다.
난 한인교회에서 직장에서 대학동문회 고등학교동문회에서 한인들을 만나서 경험했기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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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쎈터빌에 있는 한인마켓에 들렸는데 한 나이든 여자가 힘들게 지팡이를 집고 한걸음 한걸음 걸어서 멀리 store에서 옮겨놓은 handicapped parking lot에 세워둔 차에 가는 것을 보았다. 대부분 한인사업체앞에는 핸디캡파킹장이 없다. 욕이 나왔다. 미국에 살면서 주인이 교회에도 다닐텐데 말이다.

<img src="https://jamespage.org/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1/202604/69da1f6597e798565448.jpeg" alt="" />(KCPC. No handicapped parking)

아니 이곳에서 크다는 KCPC 중앙장로교회는 건물앞에 핸디캡이 아닌 방문객들 파킹장을 만들고 단 한번 파킹하게 한다. 완전 사업체가 손님을 더 늘이는 방법이다. 해서 재정적으로 더 충만하기를 고대하면서 말이다. 그들은 여러 한인교회들과 함께 장애인들이 교회앞에 파킹하는 것이 창피?하고 헌금을 많이 내지않고 힘이 없다?고 핸디캡파킹장 멀리 만들기에 앞장 서고 있고 한국에서는 “병신”이 두번째로 많이 하는 욕이라고 들었으니 할 말이 없다. 그런 한인건물안에서 두손을 들고 사랑을 외치는 사람들이 광신자로 생각된다. 하지만 잘 지키려고 하는 한인교회도 있다. 뉴욕 퀸즈 한인교회이다. 거짓으로 핸디캡파킹을 하는 한인들이 많으니 문제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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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운전하다가 한 미국인교회를 보았는데 교회정문앞에 위치한 handicapped parking lot이 인상적이었다. 미국인교회에서는 전혀 파킹 문제가 없다. Cornerstone Chapel에서는 임시 팻말로 장애인 파킹장 싸인을 더 만들어 불편함이 없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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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에는 아들집에 가서 Tesla Charging Nema 14-50를 만들어 주었다. Electric panel이 멀리 있어서 힘들었지만 다 만들고 나서 아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니 보람이 있었다.]]></description>
			<author><![CDATA[James Park]]></author>
			<pubDate>Sat, 11 Apr 2026 10:14:4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jamespage.org/?kboard_redirect=1"><![CDATA[오늘의 단상]]></category>
		</item>
				<item>
			<title><![CDATA[I prayed that God would show me the answer to my prayer.]]></title>
			<link><![CDATA[https://jamespage.org/?kboard_content_redirect=392]]></link>
			<description><![CDATA[어제는 President Trump가 이란이 협상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8시 두시간전에 간절히 기도했다. 큰소리도 지르면서 이란국민들이 평화롭게 살도록 전쟁이 끝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strong>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7)</strong>

전쟁은 하나님이 주관한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나의 기도의 응답을 보여달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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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가 가까와 뉴스를 보니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과 두주간 서로 싸우지않겠다는 협상이 이루어졌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한 나의 기도가 이루어졌나? 아니면 우연인가? 헷갈렸지만 어쨌든 기도의 응답은 된 것이라 생각되었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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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침에 어제 며느리가 Tesla model Y를 사서 내일 아들집에 가서 Tesla charging을 위해 Nema 14-50를 만들어주려고 몇가지 물건을 사려고 한다. 같은 차의 Auto Pilot이 잘 작동해서 지난 주말 닥터김은 Pennsylvania에 가서 일을 보고 집에 Auto Pilot으로 왔다고 해서 감탄했었다.
난 아내에게 보트팔고 RV팔고 Toyota Highlander와 Acura TL을 팔고 Tesla차를 살까? 농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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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막내동생의 아내가 동생이 살아있을때 소중히 산 audio system을 가져가라고 해서 그녀가 사는 집에 가서 pick up하려고 한다. 난 동생이 $3000이 되는 스피커를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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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e에서 위의 45파운드되는 amp 하나를 찾아보니 $1300한다고 나와있다. 사실 내가 필요한 것은 amp하나이기에 system이 old라 아들이 가지겠다고 하지않을 것이기에 팔수있을지 모르겠지만 팔게 되면 제수씨에게 줄 생각이고 만약 팔지 못하면 교회에 기부할려고 한다.
제수씨가 거의 30년이상을 살던 집을 팔려고 한다고 해서 봐줄 곳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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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했다. 어떻게 쉬지말고 기도할 수 있을까? 아니 쉬지말고 기도할 거리가 있나? 삶에 문제가 많은 사람들은 기도할 제목이 많겠지만 삶이 잘 정돈되어 재정적이나 인간관계나 어느 것도 걱정거리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기도제목을 말하라고 하면 선뜻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살아 숨쉬는 것이나 몸이 건강하고 자식도 나름대로 어려움없이 사는 것도 감사에 들어가지만 무엇을 더 기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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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이름있는 목사는 몇시간 동안 기도하는데 “주여…”라고만 말했다고 하는데 말이다. 물론 어제 이란을 위해 기도했듯이 힘들게 고통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기도가 나오기는 한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기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매일 나의 삶을 제쳐놓고 세상을 위해서 쉬지말고 기도할 수도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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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인교회의 한 장로는 교회 새벽기도에 와서 자리에 앉자 습관적으로 내뱉는 첫말이 “주여! 주시옵소서…”라고 들었다. 아마 기도제목을 얘기한다면 한국사람들이 미국인들보다 많을 것이다. 남을 위한 기도보다 자신을 위한 기도말이다. 모든 것이 분명하지않다. 자식과의 관계나 부모와의 관계나 친척 친구들과의 관계, 교회에서도 목사나 교인들과의 관계가 쉽게 얽매이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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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교회의 주일 예배에 보면 목사들이 제사장 같이 권위를 상징하고 싶은지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많다. 교인들도 습관적으로 옷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러기에 한인들에게 예배는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복장으로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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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다닌 미국인 교회들은 주일예배에 특별한 날이나 경우가 아니면 목사들은 예복이 아니라 보통 입는 옷을 입는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교인들이 편하게 옷을 입고 교회에 와 예배드리게 하는 목적도 있지만 교인들에게 예배가 평소에 어느 곳에서든지 입는 옷에 상관없이 드릴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 성경에 있듯이 신령과 진정이 있으면 예배드릴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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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쉬지 않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끊임없이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하나님을 의식하고 영적으로 교제하는 마음을 꾸준히 유지하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의지하며, 기도를 일상생활의 일부로 여기라는 의미로 운전 중이든 일하는 중이든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삶속에 불안하거나 두려움을 느낄 때, 즉시 그 생각을 하나님과의 대화로 바꾸고 좋은 일뿐 아니라 기도를 특정한 자세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끊임없는 양방향 대화로 모든 상황에서 특정한 자세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다. 🧡]]></description>
			<author><![CDATA[James Park]]></author>
			<pubDate>Wed, 08 Apr 2026 11:49:0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jamespage.org/?kboard_redirect=1"><![CDATA[오늘의 단상]]></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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