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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dongsik

비운의 남이 장군

JHL 2020.09.18 00:23 조회 수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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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悲運의 南怡 將軍

 

남이 장군(1441-1468)은 조선 3대 왕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손자로 태어났다. 정선공주는 조선 사대부 집안의 남휘와 혼인하여 아들 남빈을 낳았다. 그리고 남빈의 아들이 남이이다. 그러니까 남이는 태종 이방원의 외증손자다. 그런데 어떤 문서에는 태종의 외손자로 되었있다. 어느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으나 정선공주의 손자가 맞는 것 같다. 남이는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지혜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세조 때 뛰어난 장수로 세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인물이었다.
세조는 한명회, 신숙주, 강희맹 등의 계유정난 훈구대신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젊은 종친 구성군 이준과 남이를 기용하였다. 게다가 남이는 1457년 17세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훈구대신 권람의 딸과 혼인하여 그의 위세가 더욱 당당하였다.
남이는 세조 때 최대의 국난인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대장이 되어 적들을 토벌하였다. 그는 당시 왕이었던 세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면서 여러 무직을 역임했다. 이런 공으로 남이 장군은 나라에서 최고의 공신이 되었다. 그 후에도 우리나라 서북 변에 살면서 자주 못된 짓을 하던 여진족을 토벌했다.
그의 직책은 날로 높아만 갔다. 이런 계속되는 승진으로 1468년 오위도총부총관 (현 참모총장)에 이르고, 그가 27세가 되던 해에 군의 최고 통수권자인 병조판서 (현 국방부장관)에까지 이르렀다. 아무도 그를 따를 수가 없었다. 그즈음 그는 北征歌라는 詩를 지었다.  이 시는 그의 기개를 잘 보여준다.
북정가北征歌
白頭山錫馬刀盡 (백두산석마도진: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서 다 닳아 없어지고)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수음마무: 두만강의 물은 말이 마셔서 다 없어지도다 )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 사나이 20세에 나라를 평화로이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 하리요)
그의 직책은 날로 높아만 갔다. 이런 계속되는 승진으로 1468년 오위도총부총관 (현 참모총장)에 이르고, 그가 27세가 되던 해에 군의 최고 통수권자인 병조판서 (현 국방부장관 )에까지 이르렀다. 아무도 그를 따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훈구세력들의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었던 그는 그를 시기했던 사람들이 꾸민 어이없는 사건으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민간신앙의 한 형태인 무속에서는 구천을 떠도는 그의 영혼을 불러 신으로 받드는 남이 장군 신이 아직까지도 이어내려 오고있다. 게다가 그는 귀신을 보는 능력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병조판서까지 오른 남이 장군의 권력을 오래가지 못했다. 용맹하고 강직한 남이를 남달리 총애했던 세조가 얼마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신 세력으로 등장한 남이 장군에게 위협을 느낀 한명회 등 조정에서 기존의 권력자들 즉 훈구대신들이 남이 장군을 모함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어느 날, 중추부사 자리에 있던 한계희가 당시 왕이었던 예종에게 이렇게 고했다.  "전하, 남이는 그 사람됨이 좋지 못하여 우리 군사를 다스릴 자가 못되는 줄 아뢰오." 
예종은 나약한 데다가 아버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보고 겪은지라 왕위에 대한 집착과 열등의식을 가진 병약한 왕이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믿는 편이었다. 결국, 남이 장군을 병조판서에서 물러나게 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남이에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에겐 겸사복장이란 하위 벼슬이 주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남이가 궐내 숙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밤하늘에 혜성(별똥별)이 나타난 것이다. 그 혜성을 보고 남이는 혼잣말을 하였다. "혜성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로다."  이때 한명희와 가깝게 지나며 남이를 시기하던 겸사복장 유자광이 그 말을 엿듣고 말았다.  그리고 예종에게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을 하였다.
평소 위용이 당당했던 남이의 기세에 위압감을 느꼈던 예종은 유자광의 고변을 믿고 의금부에 남이를 넘겨 문초하기에 이른다.  졸지에 역모자로 전락한 남이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남이는 국문에서 결코 역모의 뜻이 없음을 굽히지 않았다. 그때 증인으로 나온 유자광은 "혜성의 출현은 신왕조가 나타날 징조로서 이때를 이용하여 왕이 창덕궁으로 옮기는 시간을 기다려 거사하겠다."라고 말을 보태어 거짓 진술을 하였다.
그래도 역모의 뜻을 품은 적이 없다고 남이가 굽히지 않자, 유자광과 그 일파들이 가세하여 역모의 증거라며 왕에게 북정가를 들고 나온다. 그런데 ‘男兒二十未平國: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화로이 못 하면’을 고쳐서 ‘男兒二十未得國: 남아 이십에 나라를 얻지(갖지) 못하면’으로 고쳐서 제시 했다고 한다. 
이 詩의 題目이 북쪽 오랑캐를 정복한다는 뜻의 시였지 나라를 지기의 것으로 삼겠다는 포부를 나타낸 시가 아니었음에도 그렇게 모함을 한 것이다. 다리가 부러지는 고문을 이기지 못한 남이는 결국 역모사건을 시인하게 돼 능지처참이라는 끔찍한 형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예종의 집권 기간에 '남이의 역모사건'으로 최대옥사를 치르게 되었던 것이다. 예종은 재위 1년 6개월 만에 병사했다.
유자광은 서얼 출신으로 남이와 함께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워 등용된 인물이었다. 그는 계략에 뛰어났다. 자신과 함께 공을 세운 남이가 세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그를 시기하다가 마침 남이가 병조판서에서 밀려나자 그를 완전히 제거할 계략을 세웠던 것이다.
남이가 그렇게 죽자 유자광은 공신 1등에 봉해지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유자광은 연산군의 폭정을 도와 나라의 정사를 어지럽힌 데 앞장섰던 인물로 더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세조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남이를 시기하던 예종이 훈구대신들의 비판이 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해임한 것이 아니냐는 뒷말도 있지만, 사실여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예종의 성격으로 보아 능히 그렇게 했으리란 평을 후세 역사학자들 중에는 주정히는 측도 있다.
다음은 남이에 대한 민간 설화이다.
그가 소년 시절에 큰길에 나가 놀고 있었다. 어느 작은 하인이 보자기에 무엇을 싸서 지고 가는데 그 보자기 위에 요사한 잡귀가 붙어 있었다. 이를 본 남이는 슬그머니 그 사람 뒤를 따랐다. 그 하인은 재상 권람의 집에 들어가는 걸 보고 문 밖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조금 있으니까 집 안에서 구슬픈 곡성이 들렸다. 소년 남이는 집안사람들에게 어찌 된 영문인가 물었다.
"하이고, 세상에 별일도 다 있지 원가, 대감의 딸이 갑자기 죽었다네." 남이는 잡귀의 짓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집 하인에게 말했다. "내가 들어가 그 처녀를 살리겠소!"
그 말을 전해 들은 재상 집에서는 어처구니없었으나 행여나 하는 마음에 소년 남이를 들어오도록 허락하였다.
남이가 처녀의 방에 들어가 보니 과연 어여쁜 처녀가 숨을 거두고 죽어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아까 보았던 잡귀가 처녀의 가슴에 눌러앉아 있었다. 그 잡귀는 용맹한 어린 남이를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고는 처녀의 가슴에서 황급히 일어나 달아나 버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처녀가 차차 소생하였다. 그러나 남이가 나오면 처녀는 또 숨을 거두게 되고 남이만 다시 들어가면 처녀는 다시 소생하곤 하였다.
남이는 잡귀에게 썩 물러가라고 큰소리로 호통을 쳐 그 요귀를 쫓아버렸다. 그리고 아까 보았던 잡귀의 이야기를 권재상에게 하고 적합한 약을 처방하였다. 그래서 남이는 죽었던 처녀를 살려냈는데, 그 처녀가 바로 권람 재상의 넷째 딸이었다.
권재상은 자신의 딸을 살려준 남이 장군이 이를 수 없이 고마웠다.  그는 남이를 사위로 삼게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더러는 김 씨라는 설도 있고 여러 가지 중의 하나를 여기 옮긴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간악한 간신배로 유자광이 비판됨에 따라 남이의 역모사건은  무고에 의한 억울한 죽음으로 판정이 내려진다.  조선 제 23대 왕 순조 18년(1818년)에는 그의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관직과 벼슬을 되찾아 복권되었다. 그리고 조선조에서 아홉 명에게 주어졌다는 忠武公이란 시호가 추서 되었다. 이순신 장군에게도 忠武公이란 칭호가 내려진 것도 그 중 하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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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그는 젊은 나이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한 맺힌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그가 북쪽 여진족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었다는 北征歌가 그에게 비극을 불러오는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그 누구도 얘상하지 못했다.
남이 장군의 무덤은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 2리에 부인과 나란히 쌍분으로 묻혀 있다. 북한강 자락에 있는 강원도 춘성 군에 '남이섬'이라는 섬이 있다. 예로부터 정확한 사실이 확인된 사실도 아닌데 남이 장군이 이 섬에 묻혔다는 전설이 담긴 돌무더기가 전해 내려왔다.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는 남이섬에 남이 장군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그 묘는 가묘假墓라고 한다.
***비석엔 '兵曹判書忠武公南怡將軍之墓'라고 새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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